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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Jan 01. 2023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1987년 여름, 광능국민학교로 전학 왔다.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전주에서 양주, 영천을 거쳐 남양주까지 다섯 번째 학교다. 거기서 반시간 거리 떨어진 진벌리 군인관사에 살던 나는, 종례하고 하굣길에 한 시간마다 있는 7번 버스 기다리기가 어중간한 날이면, 철마산 자락을 향해 난 도로에 솔방솔방 걸음을 놓았다. 


 활짝 핀 코스모스를 손으로 훑으며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때, 마침 지나던 스텔라 승용차가 멎더니 창을 내린다. 같은 반 소녀와 어머니다. 태워주신대도 마다하고 고개를 홰홰 저었다.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이지만 부럽거나 하진 않았다. 공부든 뭐든 어디 기대지 않고 제 힘으로 해낸다는 다부진 시골소년이었다. 


 그러나 큰물에서 커보자고 서울로 옮겨와 경쟁에 치이면서, 부족함을 못 느끼고 자란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다. 중학생 때도 고등학교로 올라가서도, 이미 학원이나 과외로 선행학습을 마친 친구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혼자 노력만으로는 수능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길게 세운 줄에서 좀처럼 선두로 치고나가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자, 넉넉지 못한 집안 살림에 불만이 쌓이고 사회적 불평등으로 시선이 옮아갔다. 


 대학 와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 지원 아래 어학연수를 가거나 고시를 준비하며 앞서가는 동기들을 볼 때마다 불안했다. 


장학금도 여러 번 받고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에 따로 챙겨주시기도 했지만 용돈이라도 벌려면 시간을 쪼개 일을 해야 했다. 화곡동 이삿짐센터, 새벽 지하철 5호선 레일세척, 결혼식장, 고기뷔페, 한자능력시험 문제집 제작, 고시원총무, 봉투붙이기, 광고회사, 옛날신문 디지털화 작업,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알바 등등을 전전했다. 


 4학년 2학기에 변호사나 회계사를 비롯한 그럴듯한 자격증 없이 구직에 나서보니, 남들이 알만한 회사는 대개 세 자릿수 경쟁률이었다. 지원서의 해외경험란을 빈칸으로 둬야하는 심경은 씁쓸했고, 면접 시 부친을 밝힌 분이 각별히 대우받는 모습에 화가 났다. 고용시장 좁은 문 앞에서 엉켜 쪼그라들던 시절, ‘나는 왜 부자로 태어나지 않아 이 고생일까?’라고 비뚤어지기도 했다.     


 출가하고 또 갖은 풍파와 더불어 나이 들어가며, 명문대나 고시, 대기업취직 말고도 사람 사는 세상 저마다의 삶은, 밤바다의 별과 같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가랑비에 옷 젖듯 시나브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거친 사회에 채여 아픈 청춘들에게, 전생에 지은대로 받는 것이니 그저 참회하고 감사하며, 자기만의 자리를 찾도록 하늘이 감동할 만큼의 노력을 더하라고 내친다면, 그건 고통에 신음하는 당사자의 생채기를 헤집는, 올챙이 적 잊어버린 개구리의 어리석음과 뭣이 다르겠는가. 조금 잘났건 많이 못났건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주고받는 나그네일 뿐이다.      


 힘들었던 나날, 날 무너지지 않게 버팀목이 되어준 건 온기 없는 입바른 소리가 아닌 정스런 벗들이었다. 일이 틀어져 원망과 분노에 찌들어 날카로워지는 내게 ‘우리 짐승은 되지 말자.’며 다독여주던 영철이, 아무 때고 불러내도 무슨 얘기든 들어주던 인기와 건택이, 좀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꾸던 옛 동지들, 지친 마음을 쉬어가는 아지트가 되어준 ‘동우네 커피집’, 어둔 세상의 봄꽃 소식 되자며 어깨기댈 자릴 빌려준 도반들, 그리고 그리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홀로 서 여유 있게 인간살이를 관조해 내는 나는 없을 것이다. 그대가 있어 인생은 살만하다.       


인생나를 알아주는 친구 하나 있으면 족하리니가슴 가득 이 세상을 담아 바라보라人生得一知己足矣 斯世當以同懷視之  루쉰魯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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