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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05. 2022

화랑대에서 성균관으로

화랑대에서 성균관으로


 고3이 되었다. 전국모의고사 지망전공란에 철학과를 쓰는 아들을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철학관 차려 점쟁이가 되려느냐, 굶어 죽으려느냐는 말이 짜증 섞인 고성에 묻어 서슴없이 나왔다. 다른 시대를 살아온 어른의 이해를 기대하긴 애당초 어려웠다. 


다 나 잘되라고 하는 소리거니 애써 받아들이려했지만, 피붙이의 몰이해는 언제나 서글프다. 이듬해 1월, 대입 본고사를 치르고 불합격을 예감한 나는, 아무데나 일단 들어가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뿌리치고 노량진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부모님의 우려를 누그러뜨리려, 당신들이 납득할만한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어려서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병영에서 자랐다. PX(군대매점)는 단골집이었고, 연병장은 놀이터였다. 반원형 양철 막사를 개조한 군대 유치원을 다니며, 저녁이면 양동이를 들고 BOQ(독신 장교숙소) 식당에 가 잔반을 받아, 기르던 강아지를 먹이던 꼬맹이였다. 바리케이트에 감춰뒀던 과자를 쥐어주며 환하게 웃던 위병소 아저씨, 육공트럭타고 다니던 위문공연, 해 뜨는 아침 군인관사 저 편에서 들려오던 병사들의 새벽 구보 함성... 군대는 내 유년기의 풍경이다.  


 가을, 교보문고에서 노란 봉투에 담긴 육사원서를 샀다. 아버지는 장군인 지인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주셨다. 1차 전형 발표가 있던 날 아침, 합격이면 내 방 등을 켜 두라고 아우에게 부탁해두고, 학원마치고 느지막이 초조하게 돌아오다, 멀리 보이는 불빛에 가슴 차올랐다.   


 시월 마지막 이틀에 걸친 2차 시험은 논술과 신체검사, 그리고 면접과 체력검정이었다. 1호선 석계역에 내려 만원버스를 타고 내린 육군사관학교. 간단한 신원확인을 마치고 2층 침대가 놓인 4인실 기숙사 방에 짐을 풀었다. 곧장 이어진 논술고사. 바닷가에서 주워온 푸른 유리돌을 부적처럼 책상위에 올려두고, 펜은 깊은 자욱을 남기며 물결처럼 흘러 지면을 물들였다.   


 신체검사를 받기위해 터널이 긴 건물로 이동했다. 지독한 긴장 때문인지 색맹검사에서부터 당혹스러웠다.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담당병사가 입모양으로 답을 알려줬다. 한고비 넘겼지만, 가슴둘레를 재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나를 군의관이 따로 불렀다. 


허리를 앞으로 숙이라 하고, 손가락으로 척추를 짚어 내리더니 차트에 뭔갈 적었다. 불안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복도에서 다음 일정을 기다리는데, 내 이름을 호출했다. 불려간 곳은 의무대장실. 빛을 등지고 큰 책상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을 굽혀보라고 했다. 척추측만증으로 불합격이니 이를 인정하는 서명을 하라고 종이를 내밀었다. 


측만증이 있다는 걸 중학생 때부터 알았지만, 여기에 걸려 그간 준비한 모든 것을 잃게 될 줄 미처 몰랐다. 아마도 57kg 밖에 나가지 않던 깡마른 내가, 맨몸으로 별 생각 없이 서 있다 보니, 틀어진 자세가 금세 눈에 띄었을 것이다.    

     

 숙소동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면접을 위해 준비해둔 메모를 방에 두고, 화랑대를 맨발로 걸어 나왔다. 부모님은 내일 올 아들이 오늘 오자 의아해하셨다. 짧게 안됐다고 말씀드리고 이불속에 몸을 묻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학원에 가서 수험서를 정리해 보라매공원 독서실로 옮겼다. 수능시험을 채 2주도 남겨두지 않은 날이었다. 


 11월 13일, 박정희 흉상을 지나 자리한 문래중학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떨지 말라고 어머니가 챙겨준 우황청심환에 깃든 정성이 무색하게도, 불수능이라 회자되는 97년 시험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지를 받았다. 부모님은 헛똑똑이라며 실망하셨다.    


 그리고 부모님과의 우격다짐 끝에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儒學東洋學部입학했다. 비로소 공자, 퇴계, 원효를 비롯한 성인의 말씀과 연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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