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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09. 2022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폐병으로 낭인이 된지 한 해가 지났다. 일자리를 구한다고는 하지만, 경력 없이 1년 묵은 졸업생에게 너그러운 일터는 드물었다. 연거푸 쓴맛을 보던 차, 선배 R에게서 소일거리로 용돈벌이나 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대방역에 내려 공군회관 건너편 골목길을 쭉 따라가다 보니, 작은 사찰이 나왔다. 동남아에서 온 듯한 스님들이 더러 보인다. 안내받아 간 자리에, 노스님 한 분이 손님을 물리시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원명스님이다. 다소 마르고 작은 체구에 형형한 눈빛, 엷은 미소가 잔잔하다. 


 스님과 R선배가 주고받는 대화를 듬성듬성 들었다. 방 여기저기 놓여있는 이국풍 불상에 눈길이 갔다. 어느덧 이야기는 내게로 흘러 스님께서는 당신이 결핵으로 고생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시며 치료 잘 받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러곤 흘려 쓴 글씨가 빼곡한 종이 한 장을 건네주신다. 


 원명스님은 대은스님의 큰 제자로, 돌아가신 스승의 저술을 모아 전집을 내려했다. 메모지 가득 찬 글자는 대은스님의 다른 이름들이었다. ‘김태흡金泰洽, 김대은金大隱, 석대은釋大隱, 금화산인金華山人, 사불산인四佛山人, 멱조산인覓組山人, 소하素荷...’ 흩어진 그의 글을 수집하는 게 내게 맡겨진 소임이었다. 희곡을 비롯해 저서만 100여권이고 발간한 잡지 ‘불교시보’가 105호에 다다른다고 했다.     


 여러 도서관과 헌책방을 샅샅이 훑어나갔다. 중고 책 한 권을 위해 이문동 신고서점까지 물어물어 찾아가고, 국립중앙도서관 마이크로필름을 신주단지 모시듯 돌려가며 낱장, 낱장 출력했다. 중앙대, 동국대 도서관에도 소장 자료가 많았다. 


 묵은 종이 향과 복사기를 벗 삼아 여러 날을 지내던 어느 날, 모든 일을 중단하고, 더 이상은 할 수 없겠다는 이메일을 R형에게 보냈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대은스님의 숱한 글에 진저리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 푼이 아쉬운 처지였지만 이런 일까지 해가며 돈벌이 하고 싶진 않았다. 이에 R박사는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다. 


“종훈. 우선 건강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기쁘다. 네가 보내준 내용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조선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이 이름 석 자를 빼고는 일제하 불교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나 또한 친일극복이 이 땅의 역사를 바로잡는 첫걸음이라 생각하는데, 대은스님의 흔적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얽혔다. 첫째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에 너무나 소홀하다는 것이다. 대은스님같이 오랜 기간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최고수준의 저술활동을 했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거다. 친일청산을 말하면서 친일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지…역사자료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둘째, 대은스님의 저술에 들어있는 긍정적 업적이다. 나는 이점이 아직까지 이 땅의 학계와 핵심소프트웨어를 지배하고 있는 친일파 후예들에게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본다. 당시 일본의 학문수준은 세계수준에 가 있었다. 지금도 대은스님처럼 독일철학과 인도철학을 이해하고, 한문에 능통하고, 일본어에 달통하고, 불교의례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이미 1920년대에 불교계의 사회복지사업에 대하여 논문을 쓰고, 불교 포교에 방송매체와 연극을 도입하고, 극본을 쓰고 방송을 하고, 100호가 넘는 잡지를 발간하고, 백여 권 이상의 저술을 쓰고, 이러한 능력과 정력을 가진 사람은 이 땅에는 없을 거다. 진정한 친일청산은 이것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을 지양할 때 가능한 거다…대은스님의 저술은 이 땅에서 소중한 사료이다…친일파들이 모두 논리를 세워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 나아가 극복이 어려운 거다…역사적 정의를 밝히는데 중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사실을 정확히 하는 작업이다. 그 후에 평가가 이뤄져야한다…어쨌든 이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대은스님의 원고정리를 하고 있는데, 조속히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 2004년 11월 4일     


 마음을 돌려 멈췄던 작업을 마저 했지만 분노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 보따리의 서류뭉치를 원명스님에게 넘기고 그 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4년 뒤 출가자로 거듭나, 만덕산에서 원불교 역사를 읽던 중, 대은스님의 그림자를 다시 대면하게 된다. 


 일제 말, 민족종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던 엄혹한 시기, 대은스님은 직접 조선총독부를 상대해, 원불교 경전 ‘불교정전’ 발행에 결정적 도움을 준다. 몰랐다면 아닐까, 그의 행적을 아는 내 마음은 적잖이 불편했다. 시류에 휩쓸려 부처님이 밝히신 인간의 길을 스스로 져버린 나약한 한 인간을 그를 통해 본다. 누구보다 빼어난 승려이기에 그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는 더 뼈저리다.      


 나는 여전히 그의 불의에 분노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불의 아래 깊이 뿌리내린 어리석음을 알며, 짓고 받는 인과의 법칙이 모든 이에게 예외 없이 드리운다는 믿음이 깊어가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어리석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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