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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Oct 08. 2020

천년의 화가 김홍도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조선시대의 화가 중 대중적으로 친숙한 화가는 김홍도와 신윤복 일 것이다. 김홍도의 ‘서당’은 중고등학교 교과서 삽화에 자주 등장하였고 신윤복의 ‘단오풍정’의 경우 공중파 광고방송에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김홍도는 중국 화풍을 벗어나 자신의 고유 화풍을 정립하고 조선시대 민초들의 생활을 해학적으로 그렸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현실적인 소재로 소박한 생활 정서와 풍류 감성이 가미되어 생동감이 넘친다. 덕분에 그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김홍도는 여백을 절묘하고 넉넉하게 구사하여 정적인 그림에 동적인 느낌을 가지도록 하였다. 

김홍도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부분보다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탓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김홍도의 일생을 입체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환쟁이라고 손가락질받고 천대받던 화원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저자의 작업은 오랜 시간을 기울여온 작업이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일생은 잘 알려지지 않아 신비로웠던 김홍도의 인생 역정을 찾아 떠나보자.     

<천년의 화가 김홍도> 표지


 김홍도는 아들이 무관으로 임관하기 바라는 김석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석무의 가문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중인 무반 집안이었으나 2대째 관직에 나가지 못해 상민처럼 살았다. 그 바람은 김홍도가 자라면서 그림 그리는데 재능을 보여 좌절되었지만 화재를 가진 듯 보이는 아들을 위해 강세황을 찾아가 아들의 지도를 부탁한다. 김홍도에 관한 다른 이들의 주장은 김홍도의 외가가 도화서 화원을 지낸 인물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김홍도를 강세황에게 연결시켰다고 말하는 점과 차이가 있다. 

표암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보물 590호

표암 강세황은 이인좌의 난 때 큰형 강세윤이 반적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는 가문의 역적 공모죄에 연좌되어 벼슬을 하지 못하고 곤궁한 삶을 이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김홍도는 심사정에게 배우기 전까지 강세황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 심사정 밑에서 수학을 하며 평생지기인 이인문을 만나 때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그림 그리는 실력을 키워 나갔다. 도화서 화원이 된 건 이인문이 먼저였다. 이인문이 도화서 별제에게 김홍도를 추천해 드디어 그도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김홍도는 영조의 만 71세 생일 축하 궁중 행사도를 그리게 된다. 이즈음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김홍도는 혼례를 치르고 22살에 딸을 얻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었다. 2년 간격으로 스승 심사정과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28살이 된 김홍도는 어용 화사가 되어 영조의 어진 작업에 참여한다. 이 공로로 김홍도는 종 6품 주부에 임명되었다. 집안의 경사였지만  종 6품이 되면 치르는 제술을 통과하지 못해 파직 직전까지 갔다. 다른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급여가 없는 관직이었다. 김홍도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주문받고 그리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속화를 그리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심사정이 공재 윤두서나 관아재 조영석이 속화를 그렸으나 후손들이 양반 체면을 구긴다는 이유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중화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선조들의 그림을 숨긴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김홍도는 환쟁이에게 쏟아지는 비아냥이나 업신여김에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스승 강세황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대한 단서를 주었다. 강세황은 진경(眞景)이 무엇인지, 진경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 보라는 물음을 던졌다. 강세황은 김홍도가 양반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그리고 싶다면 그들 삶을 찾도록 하였다. 김홍도는 틈나는 대로 서민들의 일상을 관찰하였다.      

김홍도의 나이 31세 때 경상도 울산의 감목관으로 제수되었다. 김홍도는 감목관으로 일하면서 ‘편자박기’, ‘대장간’, ‘해암타어’, ‘송하맹호도’를 그렸다. 잠깐 ‘송하맹호도’를 살펴보자. 김홍도가 화본이나 상상에 의존해 그린 게 아니라 본인이 여러 차례 호랑이의 행동을 직접 관찰한 후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호랑이는 등을 곧추 세우고 꼬리를 치켜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호랑이의 자세에 긴장감이 서려 있고 호랑이의 전신은 초상화를 그리듯 섬세하게 터럭 하나하나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호랑이의 위용이 잘 표현되어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사실을 관찰한 뒤 어느 한순간을 동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한다.       

송하맹호도

김홍도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강세황을 만나 풍속화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옛날 중국의 제나라 어느 화가가 ‘닭이나 개를 그리기는 어렵고 볼 수 없는 귀신을 그리기는 쉽다’고 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렇게나 그려서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말인데, 너의 그림은 목장의 생활, 바닷가의 생활, 그리고 씨름판의 풍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구나. 천부적 소질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 참으로 절묘한 재주다” 

라는 평을 듣고 더욱 정진한다.

 김홍도의 ‘씨름’을 보자. 왼쪽 다리가 들린 사람은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상대편은 계속해서 굵은 팔뚝에 힘을 주다가 어여차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씨름꾼들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는 구경꾼들의 표정에서는 마치 실제로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원형으로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균형 있는 배치로 네모진 화폭의 가장자리를 적절히 처리함으로써 훌륭한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김홍도 '씨름'과 '무동'

‘무동’을 보자. 무동의 춤과 연주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까치발에 한껏 꺾인 발목, 춤사위와 바람에 날린 허리띠와 옷깃이  흥이 오를 대로 오른 무동의 표정과 어울려 무척  흥겹다. 또, 각 악기의 연주 가락들이 한 곳으로 몰리는 배치는 그림 감상자가 미니 콘서트에 참석하는 듯한 감흥을 일으킨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 일부에서 사회계층 간 대립이나 저항의 표현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김홍도가 살던 조선 후기는 봉건적 신분 체제 시기이고, 김홍도는 중인 출신이라 이런 시각이 나타난 듯하다. 그러나 김홍도의 풍속화나 그의 전체 회화작품을 살펴볼 때 사회개혁의 의지나 지배층을 향한 분노, 저항의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대 사회적 수요에 적극적, 능동적, 창의적으로 부응하여 당대 미감(美感)을 창출하는데 앞장섰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요컨대 김홍도는 사회적 흐름에 적극 부응하여,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에 있어서 미술 분야의 일인자가 되었다.     

1788년 김홍도와 김응환이 두 달 여정의 봉명사행을 마치고 정조에게 다섯 권의 화첩으로 금강산의 풍광을 담아 바쳤다. 김홍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애써 보려고 하지 말고 보이는 것만 그리자 복잡하게 그리려 하지 말고 간결하게 그리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물과 산, 그리고 기암절벽의 형상을 간결하게 그렸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정선, 심사정, 이인상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탁월한 공간 구성과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1789년 김홍도는 정조의 대마도에 다녀오라는 두 번째 봉명사행 명을 받는다. 동행했던 김응환은 부산 동래에서 갑자기 급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해 겨울 천식으로 몸져누워 고생한다. 1790년 정월 스승 강세황이 세상을 떠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술로 시름을 달랜다. 이 시기에 그린 건 ‘송석원시사야연도’이다. 언덕 가운데 촛대가 하나 서있고, 개다리소반에 술병과 주발이 놓여 있다. 조촐하다. 그러나 시와 술, 보름달과 술만으로도 낭만과 멋이 묻어난다. 달빛 아래 은근히 서글픔과 그리움이 엿보인다. 주위로 분위기에 도취된 9명의 동인이 자유분방하게 둘러앉아있다. 정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오랜 친구들을 그립게 만드는 몽환적인 분위기다. 중년에 이른 김홍도의 중후한 멋이 보인다.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김홍도가 바로 1794년 5월 일본에 갑자기 나타나서 10개월 동안 200여 점의 그림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천재 우키요에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김홍도가 일본 쓰시마 섬에 지도를 그리러 간 시기와 샤라쿠가 나타난 시기가 겹치고, 화풍에 있어서 필체나 여타 등이 유사하며 김홍도나 샤라쿠가 발가락이 6개여서 그들이 그린 그림 중 발가락이 6개인 그림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는 실제로 김홍도가 일본 쓰시마에 지도를 그리러 갔다는 시기는 1789년이고 샤라쿠는 1794년 5월에 나타나 10개월간 활동하여 시기가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김홍도는 1791년 12월 22일부터 1795년 1월 7일까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었던 연풍현 현감으로 재직했음이 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일화는 인상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일본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는 샤라쿠만큼이나 김홍도가 뛰어나다는 자부심의 발로로 생긴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1794년 김홍도는 연풍에서 3년을 현감으로 봉직하고 파직당한다. 의금부로 압송당하지 않고 연풍에서 대기하다 혜경궁의 회갑 기념 대규모 사면령을 받고 풀려났다. 김홍도와 가족들은 괴산을 떠난다. 1791년 김홍도는 유유자적하며 산천을 주유하다 보면 새롭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떠오를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한가롭고 조용한 주변 경관에 빠져들었다. 김홍도의 만년이 그리 편안하지 않았음은 기록상으로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우리 산천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화조 등을 그려 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적 정취가 짙은 독자적인 화풍으로 승화시켰다.     

‘게와 갈대’ 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나 그림에 있는 글의 의미를 보고 김홍도의 기지에 한참 동안 그림에 빠져들었다. 게 세 마리가 갈대를 물고 있다. 아마 초시(初試)에도 합격하지 못한 이에게 드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글은 ‘위유로신행찬수(爲柳老贐行饌需寫贈)’이다. ‘유 씨 노인께서 과거길 떠나시는데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이놈을 가지고 가서 가시다가 게장을 끓여 드십시오!’라는 의미다. 익살스럽게 쓰인 제목을 보면 조금은 서글프다. 허구한 날 떨어지면서 또다시 늙은 몸으로 과거 길에 오르는 노인의 마음은 얼마나 처량할까? 그래서 아마 김홍도는 유 씨 노인이 과거 보러 가는 마음 무거운 길에 우울함을 풀어주려고 ‘가다가 게장 끓여 드세요’라고 써서 가벼운 웃음을 짓도록 한 것 같다.      

김홍도의 기지를 볼 수 있는 위유로신행찬수(爲柳老贐行饌需寫贈)

1804년 김홍도는 59세가 되었다. 그의 아들은 겨우 12살이었다. 몸이 아픈 그는 제자가 있는, 따뜻한 전주로 내려갔다. 그는 병중에도 어린 아들을 걱정하며 돈을 벌기 위해 붓을 들어야 했다. 그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 말미에 진한 부정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선생님께 보내는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탄식한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건 매한가지다.  

1805년 김홍도는 심상규에게 ‘공산무인’을 남겨두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심상규는 거장의 쓸쓸한 마지막을 지켜보고 친구 서용보에게 편지를 쓴다.

김홍도 '공산무인'

“화사 김홍도가 굶주리고 병들어 먹을 것을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이 사람은 이 시대에 재주가 훌륭한 사람인데 그 곤궁함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샤갈, 고흐, 미로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전시회가 꾸준히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에 가서 거장의 선과 색채를 대하면 말로 하기 힘든 울림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거장이 없나 아쉬워했다. 하지만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여백의 미와 몽환적인 분위기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애상적인 분위기는 김홍도가 아니면 구사하지 못한다. 김홍도의 그림이 주는 그 벅찬 느낌을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만 김홍도의 ‘공산무인’에 적힌 글귀로 거장의 최후가 주는 아쉬움을 남기고자 한다.      

“빈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空山無人 水流花開” 


본사와 제휴한 외부 필자에 의해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서평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본사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 Nebula20

<천년의 화가 김홍도> 소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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