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자의 리뷰] – 『인류, 이주, 생존』
『인류, 이주, 생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소니아 샤 지음, 성원 옮김
이 책을 한창 읽고 있을 때 경북대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이슬람 사원 건축을 반대하며 폭력적인 내용의 플래카드를 주로 유학생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붙였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보았다.
이슬람 사원 건축을 반대하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가득한 플래카드와 차로 골목을 가로막은 사진 여러 장도 같이 올라왔다. 법원에서는 건축재개 통보를 했으나 주민들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막는 중이라고 했다. 이슬람 사원이 무슨 잘못이며 이슬람교도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악영향을 끼쳤다고 저렇게 반대는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가 살던 나라를 떠나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종교 활동을 위한 사원을 짓겠다는 데 왜 저토록 강렬하게 반대하는가? ‘그들은 대학을 먹여 살리고 노동력을 충원해주는 우리에겐 고마운 사람들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류, 이주, 생존』은 우리의 이런 행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얼마나 비열하고 잘못된 일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 소니아 샤는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부모는 인도 태생 의사로 미국이 의료인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미국에 이민 와 정착하였다. 미국에서 의사로 자리를 잡고 인정받는 삶을 살면서도 저자의 부모는 언젠가는 인도로 돌아갈 것이라며 인도에 집을 사두었다고 한다. 이 책은 완벽한 미국인인지만 미국에서는 이주민 대접을 받고 인도에선 외국인 취급을 당하는 저자가 가진 질문, 즉 ‘이주는 혼란을 초래하는가?’에서 시작되었다.
인류의 이주는 생존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동식물은 기후 위기로 자신의 터전이 공격당하자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동한다는 사실이 1996년 ‘바둑판 점박이 나비의 이동’으로 증명되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인간의 이주도 생존을 위해 진행되었다. 다만 인간은 누구의 이주는 환영하고 누구는 허락하지 않는 선택적 태도를 가졌다.
우리가 말하는 ‘~~출신’이라는 표현은 18세기 유럽의 자연연구가들이 자연계를 분류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간과 야생동물이 아주 오래전부터 각자의 서식지에 붙박여 있다는 부동성의 사고를 키웠고 이러한 사고는 이주자와 이주는 변칙과 교란을 일으키는 원흉이라는 생각의 기초가 되었다.
린네는 『자연의 체계』에서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만든 것은 어떤 것도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주와 변화를 무시한 채 정착설을 주장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을 체계에 끼워 맞추며 오랜 시간 유럽인은 외국인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수하다는 엉터리 이론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핑계로 인간의 존엄 자체를 무시한 ‘우생학’을 옹호하기 위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민자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였지만 일부 인종을 이민자에서 제외하는 잔인한 이민자법을 제정했다. 1965년 이민자법을 파기한 후 미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민자들의 출산을 제한했다. 인기 토크쇼 ‘죠니 카슨 투나잇 쇼’는 이민자의 출산 제한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매체였다. 어떻게든 난민을 적게 받으려는 다양한 꼼수도 ‘이주자는 위험하다’는 위험한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 모든 이론은 틀렸음이 증명되었지만 수 세기에 걸친 외국인 혐오와 인종 폭력의 단단한 지원군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진화론에 따르면 전세계 인류의 기원은 아프리카다. 우리의 뿌리는 같고 고향은 모두 아프리카이다. 육로로 때론 바다로 이동하여 살기 적당한 환경에 정착하고 그 환경에 맞도록 몸을 발전시켰다. 인간은 단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진화했을 뿐 우등한 인종도 열등한 인종도 없다고 저자는 다양한 이론을 통해서 설명한다.
실제로 일자리와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이주한 이주민들은 토착민보다 건강하고 두뇌도 좋다.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 이주민들은 자신의 나라에선 누구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들인 경우가 많다. 다만 이런 사실을 우리가 애써 인정하지 않는 것 뿐이다.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동경하면서 이주민에 대해 색안경을 쓰는 우리 태도의 모순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같은 이유로 생존을 위해 이주를 감행하는 동물에게 우리는 길과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인간은 그들이 살 곳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장악하여 사용한다. 결국 터전을 잃고 새로운 곳을 찾아 길을 나섰지만 새롭게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생명체는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도 바로 그들의 자유로운 이주를 방해한 결과이다. 지금 이곳에 살고 있지만 우리 역시 언제 어떤 이유로든 이주민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줄곧 우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순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순자는 스코티시 스트레이트 품종이다. 이 고양이들이 원래 살던 곳은 스코틀랜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모든 생물이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하고 이주는 위험한 행위라는 잘못된 생각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했다면 순자는 지금처럼 우리 집에서 매일 스무 시간 이상을 자면서 한가한 삶을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화가 진행될 때마다 움직이는 종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자연이 언제나 경계를 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혹시 이주와 이주민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니 이해할 수 없다면 이 책을 찬찬히 읽어라. 책장을 덮으며 태어난 곳에서 별로 멀리 이동하지 못하고 사는 자신에게 화가 나 가방을 챙길 계획을 세우게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