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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Jul 13. 2020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표지

 스마트폰을 든 소크라테스. 저자 마이클 린치에게 붙이고 싶은 별명이다. 생각보다 조금 신식인 이 소크라테스는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이 왜 ‘좋아요’를 누르거나 다른 이의 글을 ‘공유’하는지, 왜 많은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는지, 보수주의자들은 왜 진보주의자들을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자들로 평가하고, 진보주의자들은 왜 보수주의자들을 철 지난 맹신을 부여잡고 있는 자들로 보는지 등 눅눅한 철학책을 탈출하여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일상의 판단과 앎에 냉철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 마이클 린치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페이스북에 왜 ‘증거가 있음’, ‘증거가 없음’, ‘정보가 더 필요함’과 같은 버튼이 아닌 감정을 전달하는 ‘좋아요’, ‘화나요’, ‘슬퍼요’ 버튼 같은 것만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최근에는 이에 더해 ‘힘내요’ 버튼도 추가되었지만.)

페이스북 감정표현 이모지 - 추가 된 "힘내요" 이모지

 이 21세기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오늘날 이루어지는 어떠한 담론의 유통이나 선택의 과정도 예사로 보는 법이 없다. 그는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각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정체를 낱낱이 보여주는 매우 귀찮고 불편한 분석을 감행한다. 소크라테스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지금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객관적 진실보다는 자아 정체성이 가미된 확신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내 확신의 정체를 들켜버려 조금 ‘찔린’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고대인들이 소크라테스의 맹렬한 질문과 분석 앞에서 당황했듯이.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에 직면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우선, 찔린 기분을 느끼게 될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식과 태도, 선택 행위의 숨겨진 근거를 상세히 마주할 수 있다. 곧, 이 책이 분석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며,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인식과 판단,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존립근거와 존재양식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보다 차분히 고찰하고, 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제시한 대로, 우리 자신, 즉 오늘날의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적확한 ‘앎’은 민주주의의 핵심 요건인 합리적 공적 이성이 작동하는 사회의 체계를 구상하고 유지하는 데에 특히 유용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우리가 진실이라고, 옳다고 믿는 것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가? 저자의 분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자. 


# 우리는 모두 지적으로 오만할 가능성이 높다 – 자존심과 진실을 혼동하며 

 저자의 인식적 통찰에 따르면, 우리 대부분은 사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방식을 물어보면, 대부분 잘 아는 듯이 대답하지만, 실제로 그 구체적인 원리를 아는 이는 별로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은 인식의 ‘오만함’은 사실 인간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다. 즉, 인간의 인식 과정 자체가 새로운 정보를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하도록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정보들을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분류하고, 처리한다. 이와 같은 직관적인 정보처리 과정은 사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생존의 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인간 인식의 한계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각종 편향적인 시선을 고착한다. 

 이와 같이 자기도 모르게 형성된 편향적인 정보처리 방식으로 습득된 인식은 현실 세계에서 자기 인정을 추구하는 사회적 욕구 및 무지를 인정했을 때 받게 되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과 결합하여 자신은 항상 옳다, 혹은 옳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지적 오만함의 재료가 된다. ‘지적 오만함은 지극히 사회적인 태도’인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순간 자존심과 진실을 혼동하는데, 자기 자신, 혹은 자기 파벌의 입지를 지키려는 자존심 때문에 이 자존심에 맞추어 습득된 정보들을 진실로 오해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만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보이는 이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며,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신이 형성한 인식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는 오만함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 우리가 기대는 정보의 바다는 사실 기만적인 인식들로 채워져 있다. 

 이처럼 오만한 인식 과정의 문제는 그러한 정보와 생각의 내용이 정말로 진실에 부합하느냐가 아닌, 자기가 속한, 즉 자존심을 발휘해야 할 파벌의 위계를 상대의 것보다 더 높게 생각한다는 데 있다. 상대를 동일한 앎의 주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 오만함은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고립적인 정보 취득 메커니즘에 의해 더 강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인터넷상의 정보들을 검색해보는데, 이러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실제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야바위꾼이 동전이 든 그릇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혼란을 야기하는 것처럼, 이미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혼란이 가중된 인터넷 공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습득하는 정보들을 통해 그저 사안의 내용을 넘겨짚어가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잘못된 것을 믿는, 즉, 진실이 아닌 것을 믿는 거짓과도 구별되는, ‘기만’에 해당한다. 기만은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더욱 위험하다. 오늘날 소셜미디어 등 대부분의 인터넷상의 정보전달 체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규칙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기만적이다. 2016년 컬럼비아대학교 연구자들은 온라인상에서 공유된 뉴스의 60퍼센트는 사람들이 읽지도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들은 공유 활동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적 태도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각종 감정 표현 버튼들로도 우리는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정보 전달 방식이 사실은 감정과 기분을 드러내는 도덕적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만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공유한 정보의 내용이 담고 있는 진실에 마음을 열기보다 서로 파벌적 자존심을 인정받기 위한 감정적 선동만 일삼으며 합리적인 공적 담론 공간을 막아버리게 된다.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성찰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인터넷 상에서의 정보 기만과 부패의 예로 '피자게이트' 사건을 든다. 2016년 미 대선 국면에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워싱턴 DC의 한 피자가게에서 아동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동영상 자료 등 인터넷에 유통되는 자료들을 통해 이 정보를 확신하게 된다. 심지어 에드거 웰치라는 배우는 이 피자가게를 습격하기까지 하지만, 그 건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이 정보를 퍼뜨린 극우파들은 이번에는 웰치가 좌파의 사주로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이라는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이는 현대사회의 매체들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보 유통이 얼마나 기만과 부패에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미국, 피자게이트 사건 이미지


#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왜 죽기보다 인정하기 싫은가

 이처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정보에는 실제로 자신의 사적 감정 및 ‘세상에 대한 심상’이 포함되어 있기에, 이러한 정보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것은 곧, 도덕에 반한다는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옳다고 믿는 확신은 사실 자아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확신은 자아상을 반영’한다. 즉, “확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지, 또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지를 알려준다.” 어떤 사안을 두고 논쟁할 때, 어쩐지 이 논쟁에서 내 의견을 바꾸면 지는 것 같고, 자존심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옳음, 확신의 문제는 사실 자아정체성의 근본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아정체성은 사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율성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어떤 입장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핵심인 의지의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옳음에 대한 확신을 포기하는 것을 많은 희생과 피해를 입는 것이라 여기게 된다. 옳음, 확신, 자아정체성은 곧 자신의 존재 기반, 자기가 중요시하는 가치의 핵심이 자리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 자기만의 확신의 공간은 자신의 유일한 의지적 자율성이 발휘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존재의 이유와 핵심을 을 보호하려는 행위기도 하다. 


# 어떤 정체성인가? – 존재의 특징을 발현하는 자존감과 무오류에 집착하는 자존심의 차이 

 그러나, 이때의 정체성은 진실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려는 자존감이 아닌, 파벌적이고 오만한 자존심인 경우도 많다. 진실한 존재 인식에서 나오는 자존감과, 오히려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파벌적 우월성만 내세운 맹목적 자존심은 구분되어야 한다. 진실한 정체성 발현을 추구할 경우, 해당 정체성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억압 기제들에 균열이 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데, 이때 단지 어떤 집단의 파벌만 그러한 자유의 이익을 독점하지는 않는다. 즉, 실제로는 많은 사회적 특권을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본인들의 목소리가 여성이나 유색인종에 비해 억압당했다는 불안을 지닌 미국 백인 남성들이 트럼프가 ‘있는 그대로’ 말도 잘하고, 자신들이 표출하지 못했던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며 이에 공감한 것은 파벌적인 정체성, 지위 박탈을 늘 두려워하는 알량한 자존심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트럼프는 이처럼 오만한 자존심을 잘 이용한 것. 

 각 사람과 집단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사회적 관계에 있어 무시되어 왔던 약자들에 관해 ‘감춰져 있던 앎’을 사회 구성원들이 알게 되고, 존중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흑인 여성의 지위를 백인 남성의 지위와 동등하게 보는 것은 사실 더 많은 이들의 자유를 증진한다는 진리 추구의 행위에 해당한다.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이처럼 각 사람의 앎과 정체성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어쩌면 사회적으로 형성된 편견에 찌든 앎을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상대의 정체성에 대한 열린 태도는 ‘정체성의 공식적인 인정을’ 자신의 파벌적 지위, 자존심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공적이고 공유된 앎’으로 나아가는 단계로 인식한다. 


# 민주주의를 위한 센스 있는 인식을 향하여  

 저자는 이와 같은 공유된 앎의 너비와 깊이를 넓히기 위해서 책 말미에 다시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돌아간다. 대화는 중요하다. 대화를 통해 정확한 진실을 알 수는 없더라도, 대화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 즉 자신이 무엇인가에 확신의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의 정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입장이 틀릴 수도 있고, 상대의 경험을 통해 나의 지적 경험의 지평이 더 넓어질 수 있다는 성찰과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된다. 대화는 사실 ‘진실’과 객관적 개념들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보통 ‘개념들’은 진실과 맞닿아 있고, 상당히 객관적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개념들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다. 개념의 경계는 정해져 있지 않고, 각기 감추어진 경험을 드러낸 정도, 그 경험에 익숙한 정도에 따라 시대마다 그 의미와 경계의 공적 수용범위가 달라진다. 여성의 참정권이나 동성결혼에 대한 태도 등, 다양한 개념들은 시대와 대중이 감정적으로 용인하는 그 선에 경계를 짓는다. 어떤 절대적인 인식도, 개념도 없지만, 인류 보편 감정이 지닌 도덕과 가치를 완전히 떠난 개념도 없다. 

 보다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동의하는 개념을 진실이라 한다면, 이 개념이 형성되는 민주적인 과정이 진실의 정도를 보장한다. 그 개념을 형성하는 민주적인 과정은 각자의 내면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즉, “진실은 당신의 자존심과는 독립적”이고, “지적 겸손함은 (알량한 자존심이 아닌) 진실에 마음을 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저자의 요약처럼, “무언가가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존심을 진실보다 앞세우려고만 하면 분열은 좁혀질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통찰은 오늘날 양쪽으로 갈라진 우리 정치지형과 각자의 확신을 통렬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틀릴 수 있고, 너희도 틀릴 수 있다는 것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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