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자의 리뷰 –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여성이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의 삶을 존중하고 여성들과 같이 이 시대를 살고자 하는 모든 남성들도 읽어주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지긋지긋한 혐오가 끝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다 읽을 즈음, 탈레반 무장 세력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그 나라의 대통령은 승용차 네 대에 돈을 가득 싣고 도망쳤다는 뉴스를 들었다. 뉴스 화면에는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비행기에 오르는 사람, 폭격을 피해 거리를 달리는 사람의 절박한 표정이 가득 찼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인터뷰는 나를 너무 슬프게 만들었다.
“세계가 아프가니스탄을 버렸다는 게 믿을 수 없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죽을 거예요, 탈레반이 우리를 죽일 거예요. 여성들은 이제 아무 권리가 없을 겁니다.”
이 여성이 내뱉은 ‘여성들은 이제 아무 권리가 없을 것’이라는 한탄은 기우가 아니다. 탈레반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인 수백만 명이 피신해 있던 파키스탄 난민수용소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종교 학교에서 탄생하였다. 이들은 남자들만 모인 환경에서 자라면서 여성을 극도로 적대시하고 한편으론 두려워하는 세계관을 굳혔다. 이들은 이전에도 집권 기간 동안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금지시키고, 부르카(눈만 내놓은 이슬람 여성 의상) 착용을 의무화하고, 여성들을 상대로 강간, 강제 결혼 등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21세기에 말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신문 국제면에서 가십처럼 다뤄지는 기사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일이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으로 차별을 받고 살아왔음에도 한 번도 이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언제,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편견’이 말하듯 여성에 대한 편견은 인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다. 이 책의 저자 잭 홀런드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이 성장한 지역이 남자가 개를 걷어차면 보호하려고 개입했지만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는 장면을 마주하면 동일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유능한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하며 사회가 가하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목격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표는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지성을 타고난 여성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이 책 역시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 중 하나다. 그러나 저자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성 혐오의 역사를 추적한다.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의 판도라 신화는 여성 혐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인류는 노동을 해야 했으며, 나이 들고, 병들고 죽을 운명을 맞게 되었다고 믿었다. 인류 불행의 이유를 여성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기원전 그리스 로마 시대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로 대표)들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믿음에 뜻을 같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인간은 다르다’라고 주창했다. 이 이원론은 기독교 교리와 만나면서 ‘남녀는 다르며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으로 존재한다.’로 변질되었다. 전체주의적인 교회는 여성을 죄악과 유혹의 근원이라고 간주했다. 1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마녀사냥’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죄 없는 여성을 음모의 용의자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이 책을 통해 곳곳에 숨어 있는 여성 혐오의 흔적을 만나는 일은 내가 기만당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성당에서 여성들만 사용하는 미사포도 그 시작은 여성 혐오였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치장은 남성의 성욕을 일으키는 악마적 행위였다. 그 아름다움을 덮기 위해 여성의 얼굴과 머리를 가리는 미사포를 씌운 것이다. 기독교 교리의 그 지독한 여성 혐오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숨차다.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였던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강간 재판에서 가해자인 남자를 변호하는 데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난 이 책을 읽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가’하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인권은 여권을 포함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성들이 문제로 삼는 여성의 무지함은 ‘교육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며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계기로 여성 문제에 대한 전기가 마련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도 여성에 대한 편견은 이어졌다. 다양한 성적 콤플렉스를 가진 프로이트는 남성 중심의 성에 사로잡혀 여성을 문명의 적으로 명시했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고 본질도 지니지 않는다’고 깎아내리며 여성 혐오를 정당화한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의 사상은 또 다른 콤플렉스 덩어리 히틀러로 이어졌다. 나치는 지독한 여성 혐오로 무장하고 수많은 여성의 목숨을 실험 도구로 혹은 성적 노리개로 사용하였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언제나 어린이와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가난은 여성 혐오를 강화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폭력은 현재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그렇고 아프리카의 지역에서 여전히 당연시 되는 할례가 그렇다.
사실을 안다는 것은 때론 잔인하다. 이 책은 긴 세월동안 여성에게 가해진 불평등과 폭력이 현재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 깨닫게 한다.
내 이름은 ‘윤혜자(尹惠子)’이다. 이름 맨 마지막의 ‘자’는 아들 자 자다. 할아버지는 내가 장남의 세 번째 딸로 태어나자 다음엔 남자 아이를 보게 해 달라는 염원을 담아 내 이름 끝에 ‘아들 자’를 넣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이름 끝의 ‘자’를 구시대 할아버지의 남아 선호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남아 선호가 아니라 여성 혐오를 덜 거북하게 포장한 단어에 불과했다. 우리의 일상엔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성 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혐오는 수면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남겨진 여성 혐오의 흔적을 찾아내 지워야 한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미 18세기에 ‘인권에는 여권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페니미즘은 휴머니즘의 다른 말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없애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인류의 반인 남자도 같이 실천해야만 한다. 그래서 너무 만연해 있고, 끈질기며, 유해하고, 변화무쌍해서 제대로 마주하기도 힘든 여성 혐오의 그 긴 끈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남자도 여자도 행복한 세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