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나에게 묵직한 감정을 남겼습니다.
나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그저 먼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들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복잡한 부채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내게는 오랫동안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과 죄책감이 있습니다.
4.3 사건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일부가 그 아픔을 방관하거나 때로는 가해자로서 작용했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주의적 정치 성향을 일부나마 가진 사람으로서 그 아픔과 부채감을 끌어안고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죠.
한강은 이 작품에서 굳이 비극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절제된 언어는 고요한 회상을 통해, 내가 사건을 직접 마주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녀는 드러내지 않는 방식을 통해 그 비극을 천천히, 그러나 깊게 경험하게 합니다.
그녀의 글에는 마치 말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는 무언의 여백이 느껴집니다.
이 여백 속에서 나는 내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무겁게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과 마주하게 되더군요.
마치 나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부채감을 상기시키는 듯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흰색’ 이미지들은 내게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서, 그 당시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린 사건의 기억과 부채감을 상기시키는 장치처럼 다가왔습니다.
눈과 소금, 백지 같은 흰색 물체들은 순수함과 동시에 부재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건의 잔재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이 흰색이 바로 우리가 잊고 싶어 했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책임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덮어버리려고 해도 결국 그 아래 남아있는 진실을 지울 수 없다는, 한강의 메시지가 내게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한강이 서술을 통해 만든 고요한 분위기는 사건을 더욱더 침착하게 되새기도록 만듭니다.
그녀는 사건을 과장하거나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독자가 조용히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 신앙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기독교의 중심 개념이라면,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는 무엇을 용서하고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피해자들이 정의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일 때 그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리고 회개를 통해 진정한 화해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작별하지 않는다>는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이 결합되어 하나의 통합된 감정으로 변해가는 여정을 그려냅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 속의 부채감을 다시 꺼내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이나마 치유와 화해의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한강은 비극을 서둘러 마무리 짓지 않고 그 여운을 남기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곱씹을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여전히 제주 4.3 사건에 대해 풀리지 않은 많은 감정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처를 함께 나누고 기억해야 할 책임감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내가 그 시절의 일에 직접적 관련은 없더라도 우리의 집단적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는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나로 하여금 그 책임을 되새기고 그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