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을 묵상하며
How well God must like you—
you don’t hang out at Sin Saloon,
you don’t slink along Dead-End Road,
you don’t go to Smart-Mouth College.
Instead you thrill to God’s Word,
you chew on Scripture day and night.
You’re a tree replanted in Eden,
bearing fresh fruit every month,
Never dropping a leaf,
always in blossom.
You’re not at all like the wicked,
who are mere windblown dust—
Without defense in court,
unfit company for innocent people.
God charts the road you take.
The road they take leads to nowhere.
Massage 성경으로 읽는 시편 1편
물소리도 머뭇거리는 새벽, 잠이 채 빠져나가지 않은 창가에 앉아 있으면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일어선다.
외로움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닌, 무게감.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
지금 이 삶은, 나라는 사람은.
그런 생각이 밀물처럼 차오를 때 나는 늘 시편 1편 앞에 앉는다.
"복 있는 사람은…"
단 한 줄.
그런데 그 한 줄 앞에 멈춰 서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다.
히브리어로는 “아쉬레이 하이쉬(אַשְׁרֵי הָאִישׁ)”.
그 소리에는 먼 시간의 모래바람과도 같은 감촉이 있다.
복된 사람.
하지만 그 복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쁨이나 성공의 뉘앙스와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바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뿌리를 내린 존재’에게 주어지는 내밀한 고요함이다.
삶의 굴곡이 격해질수록 나는 복의 정의를 자주 오해했던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복된 사람이라고 여겨온 삶.
하지만 시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복된 삶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삶이라고 믿는다.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고, 성취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그래서 그 길을 걷는 발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마치 삶이 더 정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시편 1편은 놀랍게도 복 있는 사람은 하지 않는 자라고 말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걸어가지 않는다.
서지도 않는다.
앉지도 않는다.
이 ‘세 번의 부정’은 마치 삶의 방향을 거꾸로 더듬어 내려가는 듯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단지 걷는 것뿐인 줄 알았다.
그저 지나가는 발걸음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멈춰 서게 되고 결국 그 자리에 앉아버리게 된다.
죄는 그렇게 사람을 불러들인다.
무심한 듯, 그러나 치명적인 속도로.
나는 그런 과정을 너무도 잘 안다.
어느 날은 ‘잠깐’이라는 핑계로 앉았던 의자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한 자리’가 되었고,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죄는 내 삶 안에 자리를 만든다.
말없이, 그러나 깊게.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 흐름을 거슬러 걷는다.
그는 오히려 '하지 않는 자'로 존재한다.
욕망의 수로를 따라가지 않고, 일상의 권태에 멈춰 서지도 않으며, 자만과 냉소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는 빈자리를 선택한다.
세상이 무심코 지나치는,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자리를.
복된 사람은 단지 무언가를 피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길을 걸어간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하나 —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이다.
여기서 말하는 ‘묵상한다’는 말.
히브리어로는 “예게(יֶהְגֶּה)”.
이 단어는 단순히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입술을 떨리는 듯 움직이며 말씀을 끊임없이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행위를 뜻한다.
마치 이빨 사이에 붙은 껌처럼, 아니, 혀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씨앗처럼.
씹고, 되씹고, 또 씹는 행위.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린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든 후에도 불을 끄지 못한 채 성경을 무릎에 올리고 있는 어떤 노인의 모습.
혹은 버스 안, 뺨에 햇살이 스치는데도 가만히 중얼거리는 젊은이의 입.
그 말씀이 그들 안에서 쉬지 않고 순환하고 있다는 것.
삶이라는 흐름 속에 말씀을 심어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내적인 소음.
복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고요 속에서도 떠들고 있고 분주한 거리 한복판에서도 혼자 다른 세계를 읊조리고 있다.
그가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이다.
그 호흡이 하루의 시작과 끝, 깊은 숨과 얕은 한숨 사이를 채운다.
그는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살아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복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아주 단순하고, 너무도 평범한 말.
하지만 나는 그 구절에서 자주 오래 머무른다.
심긴 나무.
스스로 자라난 들풀도 아니고, 바람결 따라 흘러든 덩굴도 아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의도와 목적을 담고 심긴 존재.
그것도 마른 땅이 아닌 시냇가에.
물이 흐르는 곳에.
필요한 것을 제때 공급받을 수 있는 자리.
나는 문득, 나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다릴 줄 아는 생명인지 생각하게 된다.
계절은 속도가 아니다.
봄에는 잎을 틔우고, 여름엔 가지를 뻗으며,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겨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조차도 나무에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계절이다.
성경은 말한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이 문장이 유독 내게 오래 남는다.
지금이 봄인데도 열매를 맺으려 안간힘 썼던 날들.
겨울인데도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던 순간들.
그 모든 조급함 앞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직은 아니다. 계절이 오면 너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복된 사람은 그걸 안다.
그래서 급하게 증명하지 않는다.
억지로 결과를 당기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에 자신을 맡긴다.
그 시간 안에서 자라고, 뿌리를 내리고, 언젠가의 열매를 기다린다.
그의 잎은 시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말라가는 바깥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러드는 물줄기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그렇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편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한 줄.
그러나 뼈에 닿는다.
악인은 시냇가의 나무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나는 이 대조가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마음이 서늘해진다.
겨.
껍데기만 남은 곡식.
무게가 없는 존재.
어떤 방향도, 자리도, 깊이도 없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따라 흩어진다.
자기의 의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떠밀려가는 존재.
한때는 생명의 껍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 무언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텅 비었다.
남은 건, 가벼움.
그 가벼움은 처음엔 자유처럼 보일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아무 데도 얽매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 가벼움은 머물지 못함이고, 관계하지 못함이며, 뿌리내리지 못함이다.
그리고 시편은 말한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말은 어떤 형벌을 내린다는 경고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슬픈 사실의 진술처럼 들린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설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 자리를 감당할 존재의 무게가 없기 때문이다.
복은 뿌리에서 시작되지만 멸망은 가벼움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은 이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런데 여기서 ‘인정하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 길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 히브리어는 ‘그 길을 지키시고, 보살피시고, 함께 걸으신다’는 뜻을 품고 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따라 함께 걷는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길의 동반자로.
우리가 홀로라고 느낄 때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 하나가 더 남아 있는 이유.
그 길은 매끄럽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을 수 있다.
열매는 더디게 맺히고 가끔은 겨울이 너무 길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길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신다.
반면, 악인의 길은 그렇게 무너진다.
누군가는 그 길을 번영이라 착각할 수도 있다.
화려한 성취와 빠른 속도, 세상의 박수 소리.
하지만 시편은 분명히 말한다.
그 길은 망할 것이다.
망한다는 건 꼭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 없이 계속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조용한 파멸인지도 모르겠다.
시편 1편은 단지 의인과 악인의 구분을 위해 쓰인 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이, 더 부드럽게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니?
너는 어떤 자리에 멈춰 서 있고 무엇을 입술로 중얼거리고 있니?
너의 뿌리는 어디에 내려져 있니?
복된 삶은 성취의 크기로 가늠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단 하나의 질문으로 판별된다.
시편 1편은 그래서 나침반 같은 시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꺼내 보는 작고 얇은 조각.
그 시를 조용히 읊조리며 우리는 다시 말씀의 강가로 걸어간다.
계절 따라 열매 맺는 그 나무처럼,
깊고 조용한 복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