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웃음 앞에서 나는 입을 맞춥니다

시편 2편을 묵상하며

by 참지않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막 찾아오는 시간이었지요.

방 안은 조용했고 창문 밖 나뭇잎은 아직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괜히 마음이 조금 울적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움이 가슴에 머물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성경을 펼쳤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러자 시편 2편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본문은 몇 번이고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에서도 자주 들었고 너무 익숙했지요.

그런데 그날은… 전혀 달랐습니다.

낯선 문장이었고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제 마음을 기다리던 편지가 이제야 도착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히브리어: לָמָּה רָגְשׁוּ גוֹיִם וּלְאֻמִּים יֶהְגּוּ רִיק

(Lamah rāgəshū gôyim ûlə’ummîm yehgū riq)

“왜 이방 나라들이 소란을 피우고, 민족들이 쓸모없는 계획을 꾸미는가?”


히브리어 동사 “רָגְשׁוּ (rageshu)”는 그냥 ‘분노하다’가 아닙니다.

이 말은 ‘들끓다’, ‘불안정하게 움직이다’, ‘요동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아직 행동으로 터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마음 안에서 이미 폭풍이 시작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불순종의 움직임이 사람들을 흔들고 있었던 겁니다.


또 하나의 단어 “יֶהְגּוּ (yeh’gu)”는 ‘묵상하다’는 말로도 쓰입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고 하였는데요, 여기서는 그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입니다.

사람들이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헛된 계획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시편 2편은 그저 시가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시가 왕의 즉위식에서 낭송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 히브리어로는 “מָשִׁיחַ (mashiach)”, 즉 메시아였지요.

그래서 이 시는 왕의 즉위를 넘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영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단지 옛날의 정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리를 거부하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야.”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그런 소리는 뉴스 속에서도 들리고 SNS에서도 들리고 그리고 가끔은 내 안에서도 들립니다.


그런 세상 한가운데에서 시편은 전혀 뜻밖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계신 분께서 웃으신다.”

히브리어: יוֹשֵׁב בַּשָּׁמַיִם יִשְׂחָק

(Yoshev bashamayim yish’chaq)

“하늘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롱이나 비웃음이 아닙니다.

그 웃음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고 어떤 것도 그분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고요한 웃음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큰 소리를 내고 이 세상이 불안정하게 움직여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시온, 예루살렘의 높은 산.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친히 왕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택하고 높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왕이 입을 엽니다.


“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히브리어: בְּנִי אַתָּה אֲנִי הַיּוֹם יְלִדְתִּיךָ

(Beni attah, ani hayom yelid’tikha)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이 구절은 단순히 다윗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연결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3장에서 이 구절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그분이 참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온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유업으로, 땅 끝을 너의 소유로 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통치가 단지 이스라엘 땅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왕이 되십니다.

모든 민족, 모든 나라가 그분의 소유가 되며 그분의 뜻이 이 땅 끝까지 퍼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다음 구절은 다소 무겁게 들립니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며,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히브리어: תְּרֹעֵם בְּשֵׁבֶט בַּרְזֶל כִּכְלִי יוֹצֵר תְּנַפְּצֵם

(Tero‘em be-shevet barzel, kikhli yotzer tenapptzem)

“너는 철장으로 그들을 부수고, 토기장이의 그릇처럼 산산이 깨뜨릴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한 파괴의 명령이 아닙니다.

‘철장’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였고 ‘질그릇’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악을 무너뜨리지만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고 지키는 울타리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조용히 말합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왕에게 입 맞춘다는 것은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 입맞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입맞춤은 단지 한 번의 고백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매 순간의 선택 속에서 “예수님, 당신이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이 말씀은 지금도 저를 조용히 흔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의 계획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웃음 앞에서 저는 다시 입맞춥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이 나의 왕이십니다.”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는 말은,

단지 한 시대의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행위로만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저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는 깊고 조용한 부르심처럼 느껴졌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입맞추다’라는 뜻의 동사가 “נָשַׁק (nashaq)”으로 표현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뜻을 가졌습니다.

왕에게 입 맞춘다는 것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복종하겠다는 신호였고 무릎을 꿇고 왕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이 말씀은, 단지 외적인 행동을 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라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요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습니다.

그분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라는 고백은 많은 신앙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시작이지요.

하지만 시편 2편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묻습니다.

“그분을 왕으로도 믿고 있느냐?”

“그분께 네 삶의 주권을 맡기고 있느냐?”

“그분의 뜻에 따라 네 하루를 순종하고 있느냐?” 하고요.


사실 저부터도 입으로는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 생각과 내 계획이 왕이 되어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감정을 따르고 기도보다 직감을 믿고 말씀보다 내 판단을 우선시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시편 2편의 마지막 구절은 언제나 너무도 조용하지만 또 너무도 단호하게 다가옵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히브리어 원문은 직접적이지 않지만 “פֶּן־יֶאֱנַף (pen-ye’enaf)” — “그분이 진노하시지 않도록” 이라는 표현을 통해 입맞춤이 순종과 평화를 이루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이 ‘입맞춤’은 단지 입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앞에 나를 기꺼이 내려놓는 전인적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예배 중에도 기도 중에도 그리고 삶 속 가장 작고 평범한 선택들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아이를 재우고 피곤에 젖은 밤에, 하루를 정리하며 숨을 고르는 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가?”

“나는 누구를 왕으로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해 곧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르거나 힘으로 백성을 누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의 발을 씻기셨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셨으며 십자가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스스로 오르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마태복음 20장 26절


이 말씀이 그분의 통치를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분은 철장 대신 찢기신 손을, 왕관 대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왕권은 자비와 사랑,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은혜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니 이 시편의 권면은 무서운 명령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랑의 초대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를 피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

히브리어: אַשְׁרֵי כָּל־חֹסֵי בוֹ

(’Ashrei kol ḥosei vo)

“그분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복되도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 아들에게 입맞추며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 날에도 사람들 말에 마음이 쉽게 상하고 스스로가 작고 보잘것없게 느껴질 때에도 우리는 그분께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다시 입맞추며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이

나의 왕이십니다.”





입맞춤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 순간 반복되는 고백이며 삶의 모든 자리에서 다시금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바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일같이 흔들리고 생각은 산만하고 마음은 지치고 무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이 시편의 마지막 권면이 깊이 다가옵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가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지 않도록 하라.

그를 피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

히브리어: נַשְּׁקוּ־בַר פֶּן־יֶאֱנַף וְתֹאבְדוּ דֶרֶךְ כִּי־יִבְעַר כִּמְעַט אַפּוֹ אַשְׁרֵי כָּל־חֹסֵי בוֹ

(Nashəqū-Var, pen-ye’enaf, ve-tovdu derekh… ’Ashrei kol ḥosei vo)


‘입맞춤’은 마음의 항복이고 ‘피한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시편은 말합니다.

그분의 품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집이고 아무리 지쳐도 다시 안길 수 있는 쉼의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그분께 입맞추는 삶이란 단지 감정적인 예배나 종교적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왕좌를 하루에도 몇 번씩 다시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행동입니다.


나는 어떤 결정 앞에서 ‘내 뜻’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입술을 다물고 가만히 내 마음속에서 기도합니다.


“주님,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이 왕이시라 믿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입맞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네 마음이 곧 진리야.”

“너는 너만의 주인이야.”

“너의 감정과 생각이 너를 이끄는 왕이야.”


하지만 시편 2편은

이 조용하고도 확실한 목소리로 그 모든 속삭임을 향해 이렇게 답합니다.


“아니야.

하나님이 보좌에 계셔.

그분이 진짜 왕이셔.”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를 왕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니?”

“너는 지금 누구에게 입을 맞추고 있니?”


이 질문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이끄는 사랑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왕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친히 우리 대신 왕이 되어 죄를 짊어지고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무력으로 왕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손과 발로 사랑으로 왕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분께 우리가 무릎 꿇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분께 무릎 꿇는 삶.

그분께 입맞추는 삶.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주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여전히 굳건합니다.


그 웃음.

그 조용한 웃음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그분은 오늘도 웃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웃음 앞에서 나는 오늘도 다시 입맞춥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이 나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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