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안에서의 탄식, 침묵 안에서의 부르짖음

시편 4편을 묵상하며

by 참지않긔

When I call, give me answers.
God, take my side!
Once, in a tight place, you gave me room;
Now I’m in trouble again: grace me! hear me!


You rabble—how long do I put up with your scorn?
How long will you lust after lies?
How long will you live crazed by illusion?


Look at this: look
Who got picked by God!
He listens the split second I call to him.


Complain if you must, but don’t lash out.
Keep your mouth shut, and let your heart do the talking.
Build your case before God and wait for his verdict.


Why is everyone hungry for more? “More, more,” they say.
“More, more.”
I have God’s more-than-enough,
More joy in one ordinary day
Than they get in all their shopping sprees.


At day’s end I’m ready for sound sleep,
For you, God, have put my life back together.


Massage 성경으로 읽어보는 시편 4편








한 줄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때로 고요한 슬픔이 필요합니다.



시편 4편은 바로 그런 순간에서 비롯된 노래였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보면, 이 시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유랑하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곤 합니다.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훔쳤고 다윗의 왕권은 흔들렸으며 그는 한순간에 사랑하는 아들이자 반역자의 얼굴을 가진 사람 앞에서 도망자의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왕이자 아버지로서의 내면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그의 주변에는 더는 확실한 충성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신하들 중 누가 나를 따르고 누가 나를 배반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백성들의 눈초리는 차가웠고 왕궁은 더 이상 그를 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런 고요하고도 잔혹한 밤, 다윗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어둠 속에서 침묵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노래했을 때 그는 깊은 곤고함의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왕궁을 떠나야 했고 신하들의 충절은 흔들렸으며 백성의 입에서는 수군거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슬픔과 왕으로서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로서의 혼란이 그를 뒤덮었지요.

그런 밤, 그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시를 시작합니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의 의의 하나님이여."



어느 날, 기도는 조용히 말을 잃고 맙니다.

어쩌면 그 침묵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탄식의 모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고장 나듯 멎는 날이면, 문장마저 희미해지고 나의 기도는 입술이 아니라 온몸으로 드러나곤 하지요.

말이 넘쳤던 어느 날의 저녁에는 그 말들이 도리어 마음의 문을 막아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멈춰 섰을 때 나는 그분을 향해 말하지 않고 다만 찾아갑니다.

눈물도 흐르지 않는 그 자리에 나의 기도는 말이 아닌 존재의 떨림으로 피어오르곤 하였습니다.



시편 4편은 그러한 고요 속 울음에 다윗이 부여한 말의 흔적처럼 다가옵니다.

억울함이 마음의 살을 파고들고 그 억울함조차 말이 되어주지 못하는 밤에 다윗은 무릎을 꿇고 한 줄의 말로 시작합니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의 의의 하나님이여."



히브리어 원문 속 다윗의 부름은 마치 속삭임처럼 들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의의 하나님(אֱלֹהֵי צִדְקִי)'이라 부르지만 그 '의'는 어떤 자격이나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의롭지 않다고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기를 바란다는 그 무릎 꿇은 자의 소망이자 언약에 대한 조용한 신뢰이지요.

억울함은 때때로 인간의 언어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그 억울함을 알아주시고 그것을 구속의 이야기로 되돌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그 하나님께 말합니다.

"곤경 중에 나를 너그러이 하셨사오니…"



그 말은 과거의 어떤 기억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시간 속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행위였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전의 고통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숨 쉴 수 있게 하셨음을, 나의 좁은 틈 사이로 그분의 자비가 흘렀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오늘, 또다시 입술 위에 기도의 첫 문장을 밀어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다윗만의 고독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향하여 그 마음을 펼쳐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려느냐? 헛된 것을 사랑하며 거짓을 구하겠는가?"



히브리어 성경 속 ‘사람의 아들들(בְּנֵי אִישׁ)’은 단순한 사람들의 의미를 넘어서 스스로 힘 있다고 여기는 자들, 자신들의 판단으로 진리조차 재단하려는 자들을 의미하지요.

그들이 다윗에게서 깎아내리는 것은 다윗의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 존재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수치로 만들고 헛된 것을 사랑하며 거짓을 좇습니다.

요즘 시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조작된 명예, 값싼 인정보다 값비싼 영혼의 소외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나는 조심스레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나는 그들과 정말 다른가요? 혹시 나도 세상의 눈치를 살피며 나의 신앙을 조용히 포기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주님만이 나의 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내가 진짜 붙들고 있는 건 내 자식의 성적, 내 월급의 숫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그 끝없는 시선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숨이 막히듯 멈춰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구별하셨다.”

시편 4편은 그렇게 선언합니다.

이때의 '경건한 자(חָסִיד)'란, 종교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애(חֶסֶד)를 사랑하며 언약의 숨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구별은 겉모습이나 행위보다 더 깊은 존재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 방향으로 나의 삶을 향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묻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요?

예배당에서 보이는 나의 단정한 미소는 정말 내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 손에 들린 성경책 너머로 내 안에는 무관심과 무기력, 심지어 불신까지 조용히 웅크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을 통해 나에게 조용히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를 향해 신실하냐? 네가 불 꺼진 밤에 속삭이는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냐? 너의 마음은 누구를 부르고 있느냐?"



나는 말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당신만이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기쁨이십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과연 나의 걸음과 말투, 나의 매일의 선택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편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루가 아주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께로 기울기를 소망해봅니다.



"침상에서 너희 마음으로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다윗의 이 말은 단순한 ‘조용히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침상은 하루의 끝, 하루의 수고를 내려놓고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대면하는 자리였지요.

나의 침상은 어떤가요.

혹시 하루의 피로 속에 하나님 대신 핸드폰 속의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잠드는 건 아닌지요.



하루의 끝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이 조용한 행위는 어쩌면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형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그 자리는 오늘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 걸었는지를 가장 진실하게 보여주는 시간일 테니까요.



그리고 시편 4편은 우리에게 다시 속삭입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이 말은 제단 위에 어떤 희생물을 바치는 제의적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지켜내는 정직함, 사랑으로 감내하는 불편함,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지켜내는 결단이야말로 ‘의의 제사’임을, 시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일상이 제단이라면 나는 어떤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요.



시편은 또 묻습니다.

“너는 누구를 의식하며 살고 있느냐? 너의 평안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이나 형편의 여유가 내 기쁨을 좌우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세상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이랴?”

그러나 다윗은 대답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이 대답은 너무도 고요하고 단단하게 우리 마음에 내려앉습니다.

주의 얼굴빛이 곡식이나 포도주보다 더 귀한 기쁨이 된다는 고백.

그 고백이 지금 나의 마음을 울립니다.



마침내, 시편은 이르지요.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오직 주께서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심이니이다.”

히브리어 원문은 여기에 더 따뜻하고 단호한 어조로 덧붙입니다.

“오직 주님만이(לְבָדָד),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십니다(תּוֹשִׁיבֵנִי).”



잠이란 그저 피곤함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 동안 살아온 신앙의 조용한 증언이자 하나님께 나를 다시 맡기는 작고도 깊은 순종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밤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습니다.

외적의 침입과 짐승의 위협, 날씨의 급변 속에서도 ‘눕고 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잠드는 이 평범한 순간도 사실은 은혜의 선물이지요.



하나님은 이 시편을 통하여 오늘도 나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오늘도 나와 함께 걸었느냐? 너의 일터에서 나를 기억하였느냐? 너의 자녀와의 대화 속에 내가 있었느냐? 피곤한 너의 밤, 내가 너의 위로였느냐?”



이 물음들은 단지 내 신앙의 점수를 매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늘 하루의 온도와 빛, 향기에 대해 물으시는 사랑의 질문입니다.

“너의 아침은 나로 시작되었느냐? 너의 분주한 오후, 나를 찾았느냐? 저녁의 조용한 고요 속에서, 나를 기다렸느냐?”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나의 하루는 당신을 위한 빈틈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간 속에, 나의 감정 속에, 나의 말과 선택과 무관심 속에, 당신의 자리가 없었던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주님,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시편 기자의 질문은 곧 나의 질문이 됩니다.

억울함 앞에서 무너졌던 날들, 말로는 당신을 믿는다고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방황하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기도라는 모양으로 주저앉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지만 그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멀게 느껴집니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은, 내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말씀을 따라 걷고 싶다는 간절함, 말씀의 결이 나의 삶의 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말씀의 리듬이 나의 걸음이 되기를 소망하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요.



그 물음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음이 곧 응답이었음을 시편 4편을 통해 깨닫습니다.

"내가 너를 너그러이 하였느니라. 내가 너를 구별하였느니라. 내가 네 기도를 들으리라. 내가 너를 평안히 거하게 하리라."



이제 나는 삶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나의 선택과 시선, 내가 아낀 것들과 내가 바라본 방향이 곧 나의 대답이 됩니다.

내가 가장 자주 부른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그것이 곧 내가 누구와 동행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시편을 두 손에 꼭 쥐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삶이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하루가 당신의 말씀 위에 놓이게 하시고 나의 밤이 당신의 품 안에서 조용히 마무리되게 하소서.

내가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당신의 질문에 대한 삶의 대답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기도가 나만의 고백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가정 속에서도 이 기도가 자연스레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자녀의 마음에도, 배우자의 영혼에도, 이 시편의 숨결이 작은 진동처럼 흐르기를 바랍니다.

아무 말조차 나오지 않는 날에도 탄식이 곧 기도가 되게 하시고 말씀으로 내 삶을 빚어주소서.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나를 조용히 감싸 안으며 따뜻하게 재워 주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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