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예배 본문 묵상 (마태복음 21장 1절 ~ 11절)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로마 황제가 방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입성에 온 도시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이분이 누구시냐고요?”
사람들은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라는 외침이 가득했던 그 길 위에서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면 오늘날 제가 사는 도시 한복판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대통령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 한 인물이 걸어 들어오는데 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리고 도시가 술렁이며 모두가 묻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야?”
이 장면은 그만큼 이례적이고도 파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종려주일의 상징처럼만 여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찬양을 부르는 장면이 익숙하게 떠오르니까요.
하지만 이 장면은 단지 한 절기의 상징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서 전체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선언이며 동시에 구약 전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핵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제게도 여전히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분이 누구이신가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구약의 예언이 신약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예수님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에게도 어떤 도전을 주고 있는지를 깊이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본문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한 절 한 절, 하나님의 말씀이 제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기를 기도하며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두 사람을 따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서 매인 암나귀와 그 새끼를 보게 될 것이다. 풀어서 내게로 가져오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심부름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놀라운 예언 성취의 의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가 묶여 있는 장소와, 그것을 본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그리고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까지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마치 모든 상황이 이미 예수님의 마음 안에 정해진 대본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과 전지하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움직였고, 모든 일이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단지 기계적인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동역자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만약 저에게 어떤 지시가 주어진다고 했을 때 아무런 설명 없이 단지 “주께서 쓰시겠다”고만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낯선 사람에게 가서 짐승을 풀고 가져오라고 한다면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하지만 제자들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긴 것이겠지요.
신뢰 없는 순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저 역시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에게도 같은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실 때 제 경험이나 계산으로는 불가능해 보일 때 저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요.
순종은 그 결과를 이해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1장 4-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하였느니라.”
이 짧은 인용문은 단지 구약 본문의 요약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의 실현임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용된 본문은 스가랴 9장 9절과 이사야 62장 11절의 복합 인용입니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와 고통, 하나님의 약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먼저, 스가랴 9장 9절의 배경을 떠올려 봅니다.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아직 국가는 회복되지 않았던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정치적 자주권 없이 살아가고 있었지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외쳐 노래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곧 어린 나귀 곧 암나귀의 새끼니라.” (슥 9:9)
여기서 ‘겸손하여’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아니(עָנִי)’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공손하거나 온순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낮은 자, 억눌린 자, 그리고 스스로를 낮춘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왕은 무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아시는 고난받는 왕으로 오신다는 뜻이지요.
나귀를 탄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평화 시에는 나귀를 타고 전쟁 시에는 말을 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귀는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의 예언 그대로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전쟁의 왕이 아닌 평화의 왕임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62장 11절은 또 다른 선포를 담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시온의 딸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저는 이 말씀이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라는 점을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을 멈추신 적이 없고 오늘도 동일한 방식으로 저에게 다가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혹시 제 삶도 예루살렘처럼 무너진 채로 회복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건 아닌지요?
스가랴의 예언은 오늘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왕이 오신다. 너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너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너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왕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 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큰 소리로 자기를 과시하며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힘과 군사력으로 나타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알아보았는지요?
이제 제 마음에도 질문이 생깁니다.
저는 과연 이 왕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내 안의 시온은 그분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저 역시 그분을 오해한 채 제 바람과 기대 속에서 그분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예언은 지금도 저를 향해 외치고 있는 듯합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신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움직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그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라.” (마 21:6-7)
저는 이 장면에서 마태복음의 독특한 묘사에 주목하게 됩니다.
마태는 스가랴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성취하고자 나귀와 그 새끼를 모두 등장시킵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한 마리만 등장하지만 마태는 두 마리를 함께 언급하여 예언의 표현을 더 정밀하게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는 어린 나귀, 즉 아무도 아직 타본 적 없는 짐승을 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두 마리를 함께 묘사하면서 예언의 완전한 성취라는 메시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스가랴의 말씀을 실현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살아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단지 신학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붙들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따지지 않았고 단지 갔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를 행하였습니다.
저는 그 단순한 순종 앞에서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깔았다는 사실에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겉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지위와 체면, 외적 존재감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그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높이는 행위였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제 삶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의 자존심, 체면, 계획을 내려놓고 그분을 위해 자리를 펴고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여전히 제가 중심에 앉아 예수님은 곁에만 두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겉옷을 깔고 있는 걸까요?
저에게 익숙한 일상, 안전한 습관, 자존심,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그 무거운 옷감들을 그분 앞에 펼쳐 드리고 있는지요?
아니면 껍데기는 벗었지만 중심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작은 나귀 한 마리, 보잘것없는 겉옷 한 벌.
그것들이 모여 왕의 입성을 준비하였습니다.
저는 그 작은 일에 순종하며 쓰임받고 있는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군중은 흥분하였습니다.
겉옷을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에 울려 퍼진 그 외침은 시편 118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으시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저는 그 외침이 단순한 기쁨의 표현만은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쉬아 나”—“지금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간구 속에는 정치적 기대와 메시아에 대한 오해가 섞여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 왕국의 재건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짙은 표현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기대했던 예수가 아니라 진짜 예수를 만났을 때 그들의 열광이 곧 실망으로, 실망이 분노로, 그리고 분노가 십자가를 향한 외침으로 바뀌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혹시 저의 ‘호산나’도 오해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는지요?
예수님을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제 바람을 이루어주시길 기대했던 적은 없었는지요?
저는 지금 어떤 기대를 품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걸까요?
그 기대가 제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고도 제 자아를 건드리지 않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이길 바라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저는 주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이 제 기대와 충돌할 때에도 여전히 그분을 붙들고 있는 사람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군중은 기뻐하며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지만 그 기쁨은 예수님을 향한 진실된 경배가 아니라 정치적 해방의 열망이 섞인 외침이었습니다.
저는 제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태도가 스며들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 뜻을 이루어주시길 바라고 제 성공과 안전을 보장해주시길 기대하며 외쳤던 수많은 ‘호산나’는 진실로 그분을 경배하는 고백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사실은 단지 겸손함의 표현을 넘어서 그분의 길이 세상의 방식과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인지요?
아니면 여전히 말 위의 승리와 권력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인지요?
저는 오늘 저의 '호산나'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묻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외침입니까, 욕망의 감탄입니까?
예수님께서 제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으실 때 저는 여전히 그분을 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제 마음속에서 그분을 폐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는 진정으로 메시아를 알아보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제 환상 속 메시아를 예배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였다.”
저는 이 표현, ‘소동하였다’라는 말에서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지진처럼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는 의미의 헬라어 ‘ἐσείσθη(eseisthē)’를 떠올리며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됩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땅이 흔들렸다는 표현과 동일한 단어이지요.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흔들림을 동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발걸음은 땅을 진동시키는 진실을 안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자 예루살렘은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누구냐?”라는 질문은 저에게도 던져지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지요?
그들의 대답은 “나사렛의 선지자 예수”였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인물로만 여길 위험이 있다는 것을 경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선지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제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안전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나사렛’이라는 말은 거리를 두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규정하였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혹시 그렇게 예수님을 이름만 부르며 정작 제 삶을 뒤흔드는 분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제가 믿는 예수님은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지요?
아니면 제가 설명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종교적 상징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요?
제가 부르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과연 어떤 인식과 고백이 담겨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진실의 지진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분이 제 삶에 들어오셨을 때 저는 그 진동을 받아들였는지요?
아니면 그 진동을 막기 위해 제 마음의 성문을 굳게 닫아버린 것은 아니었는지요?
저는 지금도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분이 누구이신가요?”
그리고 제 삶 전체로 이 질문에 대답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진실이라면 그에 걸맞은 삶이 제게 따라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제 인생이라는 예루살렘이 주님으로 인해 진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진동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분을 저의 구세주이자 왕으로 맞이하는 그 순간이 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시금 천천히 되새겨 보았습니다.
나귀를 타신 왕.
겸손하신 구원자.
스가랴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에 의해 오해받고 잘못 기대되며 결국 십자가로 향하신 분.
이 장면은 단지 2천 년 전 예루살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 제 심령과 삶의 자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 도성, 곧 제 마음에 입성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 삶의 도성—저의 마음, 가정, 관계, 시간표, 우선순위, 내면 깊숙한 자리까지—그분의 임재로 채우고자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을 왕으로 맞이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여전히 제가 제 마음의 왕좌에 앉아 예수님을 초대하되 단지 손님으로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은 그분의 방식이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분이 말이나 전차를 타고 오셨다면 저는 압도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제 삶의 문턱까지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비우고, 마음을 열고, 제 왕좌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주 예수님을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나 제가 진정으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는 그분의 뜻이 제 뜻보다 우선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제 계획보다 앞서고 주님의 명령이 제 감정보다 앞서며 주님의 길이 제 안전지대보다 앞선다면 그제야 저는 진정한 왕을 맞이한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지금도 제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은 활동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봉사와 찬양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반드시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은 단지 입술로 내뱉는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저의 주인이시며 저는 이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혹시 지금 제 안에는 아직도 예수님을 판단하고 거절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제 마음과 일상의 중심에는 다른 왕이 앉아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의 입성은 그분께서 그 자리를 회복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제게 입성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분은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저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지금 제 심령에 ‘호산나’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다면 그 외침이 진정한 회개와 믿음, 순종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분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저는 그 문을 열 것인지, 아니면 닫아버릴 것인지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