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Day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밤이 깊어질수록 말씀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어떤 말씀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상처처럼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오래도록 맴돕니다.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도 그러했습니다.
찔림과 상함, 징계와 채찍.
이 모든 단어들이 하나같이 제 영혼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감싸 안으며 깊은 침묵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고귀한 희생에 관한 문장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저는 이 말씀 안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상처 안에서 제 안의 고통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는 것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히브리어 mecholal, ‘찔리다’, ‘뚫리다’라는 이 단어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살과 뼈를 꿰뚫는 깊은 아픔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를 타고 흐르듯 이 단어는 피의 언어로 제 죄를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을 찌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만과 냉소, 하나님 앞에서의 무관심과 이기적인 마음이 그분의 몸을 관통하였습니다.
제가 죄를 감추려 할수록 말씀은 더욱 깊이 파고들어 “그 허물이 바로 너의 것이었다”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상함’이라 번역된 meduka는 단순히 다친 정도를 넘어 산산이 부서진 상태를 말합니다.
형체도 없이 짓밟히는 고통입니다.
저는 얼마나 자주 저의 죄악을 그저 약점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속여 왔는지요.
단지 느끼는 데 머무른 회개, 끝내지 못한 순종. 그
러나 이사야는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것은 단지 연약함이 아니라 죄악이며 그 죄는 누군가의 존재 전체를 짓밟아 버리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 무게를 그분께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나를 위해 아무것도 빚지지 않으셨던 분이 오히려 나의 죄 값을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이 평화는 우연히 주어진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피 흘림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무거운 대가였습니다.
히브리어 musar, ‘징계’는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법적 형벌을 뜻합니다.
그분께서 받으신 징계는 단순히 고통을 넘어서 공의의 실행이었습니다.
그 대가 위에 우리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shalom은 단지 마음의 고요함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인간 사이의 화해, 내면의 전인적 치유까지를 아우르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오늘 제가 숨을 쉴 수 있음도,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음도, 모든 것이 그분의 징계라는 뿌리에서 피어난 은총의 열매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채찍’, 곧 chavurah, 그분의 등과 어깨에 남은 타박, 멍, 찢어진 자국들이 떠오릅니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고통은 고통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상처를 통해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숨기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상처를 드러내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십니다.
그의 피멍 든 자국은 낭만적인 상징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움직이는 회복의 능력입니다.
저는 여전히 스스로를 고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죄책감과 무기력, 두려움과 정죄에 짓눌릴 때마다 저는 그분의 채찍 자국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처들 안에서 비로소 숨을 쉽니다.
이사야는 이 말씀을 선포하던 그 시절, 아직 예수라는 이름조차 들려오지 않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았습니다.
침묵하는 종, 대신 고난당하는 사람, 징계를 짊어진 존재, 상처로부터 회복을 흘려보내는 자를.
마치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듯 그는 이 말씀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의 시대는 암울하고 무기력했으며 율법은 껍데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이 놀라운 구속의 예언을 들려주셨습니다.
“너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 내가 감당하겠다.”
이 말씀은 경고가 아니라 회복을 향한 가장 깊은 사랑의 약속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이미 성취된 복음’으로 대면합니다.
주께서는 실제로 찔리셨고, 실제로 상하셨으며, 실제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제로 평화를 누리고 있고 나음을 입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여전히 오늘을 향한 현재형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여전히 상처를 내고 있으며 여전히 낫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한때 감동을 주는 문장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복음의 중심입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조용히 이렇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제가 찔렸어야 했건만 당신께서 찔리셨습니다.
제가 상해야 했건만 당신께서 상하셨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징계를 당신이 받으셨고 그로 인해 저는 평화를 누립니다.
당신의 채찍 자국에서 나음을 입은 이 은혜를 단 하루도 잊지 않게 하소서.”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한 구절은, 제 영혼을 살린 가장 깊은 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말씀 안에서 저는 다시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