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Day 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사람의 말이 과연 영혼을 울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드린 기도가, 그것도 죽음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 토해낸 한 마디가 세기의 시간을 지나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가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그 기도, 누가복음 23장 34절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하면서도 조용한 대답이 되어 줍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짧고 단호한 문장은 단지 감동을 위한 기록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 전체가 이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으며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난 장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만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피로 물든 나무 위에서 짓눌린 심장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내뱉은 절절한 호흡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단말마의 숨결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기도는 단 한 번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elegen, 즉 “계속해서 말씀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발적인 외침이 아니라 피를 토하듯 반복해서 드려진 절박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갈비뼈가 벌어지고 몸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의 순간에 가장 순전하고 뜨거운 사랑의 언어를 토해내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곧 그분의 마지막 설교였으며 고통으로 새겨진 복음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고백은 인간을 향한 가장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탄식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을 덮어주기 위한 자비로운 표현이 아니라 죄의 실체를 누구보다 정확히 아시는 분께서 하신 날카로운 진단이었습니다.
인간은 때로는 무지 가운데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무지 속에서 십자가가 세워졌고 예수님께서는 그 무지를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함은 누구에게나 가장 쉽게 내보일 수 있는 고통의 언어일 텐데도 주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 대신 자신을 찢는 자들의 편에 서셔 그들을 위한 변호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중보하셨고 그들의 죄가 그들을 파괴하기 전에 하나님의 자비가 먼저 덮어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낯설고도 동시에 고개 숙이게 만드는 사랑입니까.
우리는 보통 자신을 해친 이를 멀리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다.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본이 아닐까요.
그 십자가 아래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그것을 나누어 제비를 뽑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 흥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흐르고 있는 자리에서 인간은 여전히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를 흘리고 계셨지만 사람은 그 피 위에서 사소한 몫을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한복판에서조차 예수님께서는 계속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무지한 자들을 향한 이해와 용서, 그리고 품으심의 기도.
주님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의 짐을 기꺼이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 앞에서는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또 쉽게 상처를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찢어놓았는지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무지가 더 이상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삶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기도가 우리의 무지를 감싸줄 뿐 아니라 그 무지 속에 계속 머물지 말라는 주님의 간절한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정의를 말합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나누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정의는 때때로 너무도 쉽게 자기 의로 변질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정의가 아닌 자비를 택하셨습니다.
정죄가 아닌 중보, 심판이 아닌 이해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저 읽히고 암송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다시 써 내려가야 할, 살아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용서란 억울함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나를 해친 이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할 때 그 순간에 비로소 진정한 용서의 기도가 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드리셨고 이제는 우리에게도 그 기도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그 기도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넘어서 타인을 위한 중보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알지 못했고 지금도 얼마나 모르고 살아가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입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른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더 조심스럽고 자비로운 언어로 살아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보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무지와 오만, 경직된 정의감과 메마른 사랑을 조용히 바라보시며 여전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 기도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잊히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 아래에서 배우고 또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음성을 들은 자로서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복음의 장면 앞에서 감동만을 품고 머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은 단지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자리로 불러들이는 부르심입니다.
시대는 바뀌었고 골고다의 언덕은 먼 과거의 기억이 되었을지라도 복음의 부르심은 오늘도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저는 무엇을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찬양받기에 충분한 장면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삶을 향한 간절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를 품으라는 도전이며 용서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저의 진심을 고백하자면 저는 그 부르심 앞에서 자주 작아집니다.
용서가 불가능하게 느껴지고 이해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 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그 기도를 과연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현실은 자주 우리를 낙심하게 만듭니다.
정의는 외면당하고, 사랑은 때로 손해로 여겨지며, 자비는 오히려 약함처럼 조롱받을 때가 많습니다.
진심보다는 전략이 통하고 중보보다는 공격이 익숙한 시대 속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고된 일처럼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지치고 포기하고 싶고 침묵하는 길을 택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그분의 음성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단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를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무지 속에 있었던 자이며 지금도 얼마나 많이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기도를 살아낼 수 없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질문의 답은 절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라는 초대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새로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실 때에만 가능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자주 실패하고, 자주 지친다 해도 다시 그 기도 앞에 무릎 꿇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도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찌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사함이 필요합니다.”
그 고백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삶으로 이어지게 될 때 복음은 이 땅 위에서 다시 숨을 쉬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기도를 품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오늘날의 십자가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감당해야 할 관계 안에, 견뎌야 할 침묵 속에, 그리고 여전히 사랑해야 할 이들 사이에 뚜렷하게 놓여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를 품고 다시 걸어간다면 예수님의 음성은 더 이상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라 오늘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도 십자가 아래에 다시 섭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기도를 저의 기도로 살아내기 위하여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사람 앞에서 흔들릴 것이며 관계 앞에서 작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주저할 것이고 용서하라는 요청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제 마음속에서 메아리칠수록 그만큼 저는 그 기도만큼 살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지만 저는 아직도 저를 아프게 한 사람의 이름조차 온전히 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분의 음성은 여전히 제 자존심을 흔들고 저의 중심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그 음성 앞에서 저는 다시 침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저도 어딘가에서부터는 닮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제 자아를 내려놓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반복되는 상처를 묵묵히 감당해야 할 것이며 침묵으로 억울함을 삼켜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
상처 준 이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야 할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어가셨기에 그 길이 복음이라면 저 또한 그 길 앞에 다시 서야 할 것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눈물과 함께 기도로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는 오늘도 제 삶을 이끄는 빛이 되어 줍니다.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처럼 저의 말과 생각과 결단 하나하나에 그 온기가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자주 넘어지고, 오해받고, 지칠지라도 저는 다시 그 기도 앞에 설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