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을 묵상하며
다윗의 믹담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2)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편을 들으며
“מִכְתָּם לְדָוִד(믹탐 르다비드)”
다윗의 믹탐
조심스럽게 발음해 봅니다.
믹탐… 르다비드. 입안에 천천히 굴리다 보면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히브리어가 점점 기도처럼 다가옵니다.
이 짧은 문장은 다윗의 시 앞에 붙은 제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고백 전체를 감싸는 조용한 서문처럼 느껴집니다.
‘믹탐’이라는 단어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해석을 제시합니다.
비밀스러운 노래라 하기도 하고 깊은 마음속에 간직된 기도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어떻든 간에 결국 이 말은 하나의 정서로 모아집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끝내 이름으로만 남겨진 신앙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믿음도 어쩌면 그러한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보다 마음이 앞서고, 의미보다 울림이 먼저 다가오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첫 문장을 꺼내 놓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이 고백이 나올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의 말에는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고백이 두려움에 쫓긴 자의 절박한 외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말하며 이미 피했다고 선언합니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하지만 다윗은 모든 가능성 이전에 하나님께 몸을 맡긴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백은 단순한 신앙의 표현을 넘어서 삶의 습관이며 시선의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이 짧은 문장은 언제나 저를 멈추게 만듭니다.
단어는 단출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주는 나의 주’—언뜻 보기에 반복되는 표현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신’이 아니라 ‘나의 주’라는 이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겠다는 조용한 선언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깊은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신앙은 늘 그렇게 명확하게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뜻대로 삶을 조율하다가 일이 어그러질 때 비로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요?”라고 물으며 되돌아가곤 합니다.
저는 이 고백을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도 정작 그 이름 앞에 순종하길 주저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음 고백이 조심스레 이어집니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으며,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줄로 재어진 구역’이라는 표현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그 안에는 정돈된 섭리와 배려가 함께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라는 넓은 들판 위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줄을 들고 나오셔서 저에게 어울리는 만큼의 땅을 조심스럽게 그어주셨다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제가 바라던 땅이 아닐 수도 있고 꿈꾸던 방향과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줄이 아름답다고 고백합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주 비교하게 됩니다.
같은 나이, 비슷한 조건 속에서 누군가는 더 멀리 가 있는 듯 보이고 나는 아직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느껴집니다.
그럴 때면 이 구절을 조용히 되새기게 됩니다.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답도다.”
이 고백은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라 믿음의 시선으로 삶을 해석하려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가장 알맞은 길이를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시고 지금은 납득되지 않더라도 그 줄 안에는 반드시 피어날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확신이 담겨 있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확신을 지닐 수 있을 때 마음은 비로소 흔들림을 멈춥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셨으며,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므로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내 앞에 모셨다’는 표현은 특별한 신학적 언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결정 앞에서 택하는 태도에 더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보이지 않아도, 감정이 따라주지 않아도, 모든 판단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
그것은 한두 번의 열정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의식의 지속을 통해 길러지는 훈련이자 습관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도 다윗 자신의 강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른편은 고대 전쟁터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습니다.
방패는 왼손에, 칼은 오른손에 쥐는 것이 보편적이었기에 오른편은 보호받기 어려운 자리였지요.
다윗은 바로 그 약한 자리를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평탄한 삶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스올—히브리어로 שְׁאוֹל(Sheol)—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말씀이 읽히지 않고 기도는 그저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한 시간.
예배 중에도 마음이 닿지 않고 삶의 중심이 흔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순간에도 “주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며 비록 지금은 느껴지지 않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음을 믿는 것.
그런 믿음이야말로 고요한 확신이며 어두운 밤을 지나며 붙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손잡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현재의 시간에는 기쁨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앞, 그분의 곁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위로를 가장한 공허한 희망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쁨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기쁨은 지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 테니까요.
저는 오늘도 작은 잔을 들고 살아갑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종종 바닥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잔입니다.
어떤 날은 비어 있고 어떤 날은 겨우 한 모금의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잔은 언제나 다시 채워지고 언제나 제 손에 다시 놓여 있습니다.
믿음이란 거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 잔을 들고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작고 조용한 결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잔 위에는 이 한 마디가 조용히 새겨져 있습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