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7편을 묵상하며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1)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편을 들으며
하나님, 주님은 듣고 계십니까. 이 깊은 침묵 속에서 제 목소리가 당신께 닿고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7편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내게 다가온 것은 다윗의 음성이 아니라 그가 끝내 말하지 못했던 한숨이었습니다.
“의를 들으소서”—그 짧은 기도는 낱말보다 무게가 컸고 너무 맑아서 오히려 쓰라렸습니다.
정직하게 살고자 했던 시간들이 내 안에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목소리를 낮추었고 얼굴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직한 이들의 고백에 더욱 깊은 무관심으로 등을 돌렸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요.
그렇게 나는 점점 말을 아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밤이 더 자주, 더 길게 찾아왔습니다.
어떤 밤은 벽을 바라보았고 어떤 밤은 빈손 위에 얹은 이마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기도는 점점 짧아졌습니다.
“하나님.”
그 이름 하나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입술을 떠나지 못한 날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자신의 입술에 허물이 없었다고.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숨을 삼켰습니다.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대신 나는 침묵 속에서 멀어졌습니다.
다윗처럼 담대하게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조용히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나를 불러 세웁니다.
시편 17편은 억울한 자의 통곡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존재를 되묻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오해를 해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옳다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의 마음을 놓아둡니다.
“שְׁמַע יְהוָה צֶדֶק” (쉐마 아도나이 체덱)—“여호와여, 의를 들으소서.”
여기서 ‘체덱’은 단지 윤리적 정직이 아니라 언약을 따라 살아온 자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시간 속에서 자신이 견뎌온 것을 펼쳐 보입니다.
“밤에 나를 시험하셨으나 허물을 찾지 못하셨나이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צָרַף’(차라프)—불로 정련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불로 달군 금처럼 살피셨고 다윗은 그 속에서 자신이 깨어지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의로움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아래서 꺾이지 않은 영혼의 증언입니다.
나는 그 말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나도 작게나마 그런 시간을 지나왔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진심이 왜곡되고 사랑이 오해받던 날들.
나는 말없이 걸었습니다.
다윗처럼—아니, 어쩌면 다윗보다 더 작게, 더 조심스럽게.
그는 이어 말합니다.
“주의 길을 따랐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이 고백은 사람의 시선 앞에서는 결코 꺼내기 어려운 문장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꾸미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고 되뇌는 말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기도란 그런 것이라고.
말보다 떨림이 더 크고 설명보다 기다림이 더 긴 자리.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그 믿음 하나로 말문을 여는 자리.
그리고 나는 오래전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늦가을, 바람 없는 오후였습니다.
손에 종이컵을 들고 서 있던 길가에서 문득 하나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 얼굴은 형체도 색도 없었지만 “너를 보고 있다”는 그 확신은 분명했습니다.
나는 컵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눈동자처럼 보이지 않지만 나를 지키는 시선.
그것이 그날 나의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소서.”
여기서 목적어닌 '나를' 즉, 히브리어 ‘אִישׁוֹן’(이숀)은 ‘작은 사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 속에 작게 비친 나.
그 조용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나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동자는 신체 중 가장 먼저 닫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보호를 본능적으로 받는 자리.
다윗은 자신이 그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도.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나를 숨기소서.”
이것은 회피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귀속의 간청입니다.
구약 성막의 속죄소, 그룹들이 펼친 날개 아래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던 그 자리.
그 아래에 백성의 죄가 덮였고 하나님의 거룩이 임했습니다.
다윗은 그 아래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이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칼바람이 불던 날 늦게 온 어머니의 품 안에서 말없이 안기던 그 느낌.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돌아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그 날개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
다윗은 이제 세상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말없이 웃고 조용히 배부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갑니다.
그들의 자녀는 번성하고 재산은 대를 잇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말합니다.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이다.”
‘פָּנֶיךָ’(파네카)—그 얼굴.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존재적 접촉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지금은 가려져 있지만 나는 언젠가 그 얼굴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는 끝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구절은 단순한 시적 결말이 아닙니다.
구약의 문맥에서 ‘깬다’는 것은 종종 죽음과 그 이후를 암시합니다.
다윗은 부활의 새벽을 희미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 고백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깨어나는 날, 모든 억울함이 설명되지 않아도 좋다고. 모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얼굴 하나로 족하다고 말하는 그 믿음. 그 고백.
나는 오늘도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유 없이 바람이 불고 말없이 저녁이 오는 날에도 그 얼굴을 생각합니다.
때로는 침묵이 너무 길어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말라버린 날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안정이나 삶의 회복을 넘는 일입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가 하나님 앞에 놓이는 일이며 내 마음의 그늘까지 드러나는 고백의 자리입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본다는 그 약속 하나로 버텨왔습니다.
그 얼굴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에도 나와 함께 울고 계셨던 그 자리였다는 것을 나는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내 억울함이 당신 앞에서 정결하게 해석되고 내 무력함이 당신 안에서 다시 숨을 쉬게 되는 것—그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구원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이다.
어쩌면 오늘은 아니겠지만 반드시 그 날은 올 것입니다.
그 얼굴이 나를 향해 빛날 때 나는 내 모든 질문을 거두고 내 모든 고통이 이해되기를 그만두며 그저 당신 안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이다.
그것이 나의 생명이자, 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