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7편을 묵상하며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편을 들으며
시편 17편을 펼쳐 읽는 순간 그 첫 구절이 너무도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라는 그 한 마디가 마치 제 안에서 아직 꺼내지 못한 말들을 먼저 꺼내버린 듯한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께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담대한 사람일까요.
아니, 과연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꺼냈을까요.
그저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스스로의 정당함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종종 기도를 하다가 말문이 막힙니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려는 그 순간에도 내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고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어쩐지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말은 많은데 막상 입을 열려 하면 어느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침묵하고 맙니다.
다윗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당당히 주장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 기세는 놀라울 정도로 분명하고 한편으로는 낯설 만큼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눈은 공평함을 보시나이다.”
이 말에는 일종의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공평함을 본다는 것, 다시 말해 세상을 기준 없이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서 억울함을 해결받고 싶다는 강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곧바로 이어집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며 나를 단련하셨사오나, 흠을 찾지 못하셨나이다.”
감히 나의 마음을 시험하신 하나님께 “흠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런 다윗을 모습을 보며 저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기도는 종종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에 대해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저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그 앞에서 내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일이 더 익숙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시에서 그 반대편의 언어를 선택합니다.
그는 정직했고 말로 죄를 짓지 않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미끄러지지 않았노라고 말합니다.
그 담대함은 도리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무엇을 붙들며 살아왔던 것인가.
내 말과 행동 그리고 선택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결로 드러날 것인가.
이 시는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자기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던지는 변론입니다.
한 사람의 억울함이 단순한 감정 표현으로 멈추지 않고 신 앞에서 삶 전체를 정리하고 다시 내어놓는 고백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앙망이 아니라 ‘의’라는 주제에 대한 다윗의 근원적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의롭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단지 자신의 선함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진실되게 살아왔다는 일관된 증명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절박한 시도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얼마나 자주 내 길이 곧 하나님의 길이었다고 착각했으며 그 길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윗은 “내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며,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최후의 진술처럼 들렸습니다.
세상이 무너지고 악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의심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아왔다고—그 한마디만이라도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오히려 묘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끝내 그 길을 놓지 않으려 했던 마음이 있기 때문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흠이 없는지를 보시기보다 우리가 흠 가운데서도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먼저 바라보시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의 초입에서 다윗은 마치 신 앞에 자신의 존재를 ‘제시’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시는 기도라기보다 고백이었고 고백이라기보다는 의지였고 의지라기보다는 살아온 삶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시편이 단순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삶을 다시 한 번 해석하는 하나의 문장들로 이어진 고요한 변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변론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드리게 될 말들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기도라는 것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이며 때로는 말이 준비되지 않은 채 마음만 먼저 나아가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됩니다.
시편 17편에서 다윗이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런 기도의 본질을 가장 밀도 있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닙니다.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침묵이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는 무게로 가라앉기 직전에 던지는 마지막 언어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부르는 목소리는 차분하지 않습니다.
격정적이기까지 한 그의 기도에는 단지 억울한 사정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라 ‘당신이 듣고 계셔야 한다’는 절박한 믿음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단순히 신앙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한 인간이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생의 어떤 밤에 이 기도의 문장 앞에 멈춰 서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소서.”
그 말은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기도의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이 단지 형식적 요청이나 마음의 위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분의 응답 없이는 견딜 수 없다는 절실한 감정의 최종 지점이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온몸으로 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깊은 층위에는 하나님의 ‘보심’이라는 또 하나의 감각이 놓여 있습니다.
“주의 눈은 공평함을 보시나이다.”
듣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결국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시선을 두시는 분이시며 그 시선은 공정하고 맑으며 외면하지 않는 시선이라는 고백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을 공평하게 보고 계시는가, 그 시선은 나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불공평함’을 목격하고 그것이 때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으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공의를 말하는 순간에도 그는 현실의 부조리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너무 분명했기에 그 모든 현실의 불균형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붙들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시선이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시선이 지금도 사람과 사건 위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고자 했기에 그는 이 기도를 멈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기도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종종 나를 지치게 만들고 현실의 무게는 내 확신을 흐릿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믿음은 더욱 선명하게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내가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일을 멈추지 않기로 선택하는 고요한 결단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런 결단의 반복 속에서 성장하는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소서.”
이 구절은 다윗의 기도 속에서도 유난히 따뜻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눈동자라는 표현은 보호의 극치를 상징하며 날개의 그늘이라는 이미지는 다정한 피난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단지 위험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그 안에서 존재가 품어지는 경험입니다.
다윗은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단지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감추어 달라고 당신의 온기로 덮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저에게도 기도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명확하지 않고 설명도 어렵고 말보다 먼저 감정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 기도를 떠올립니다.
‘감추소서’라는 한 마디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도, 침묵 속에서 존재를 내어 맡기는 기도, 그것도 하나님은 받아주신다는 신뢰가 이 문장 안에는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당신은 지금도 들으시고 계십니까.
제가 드리는 이 간청이, 이 내밀한 속삭임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시선 안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 물음에 대한 확실한 응답은 때때로 오지 않지만 그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일 자체가 기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기도 안에서 살아가는 일이 믿음이라는 것을 저는 오늘 이 시편을 통해 다시금 배우고 있는 듯합니다.
시편 17편의 중반부로 들어가면서 다윗의 기도는 처음의 내면 고백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어둠을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그가 마주한 상황은 단순히 감정적인 고통이나 개인적인 원한의 문제라기보다 삶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불의의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시편이 더 이상 고대의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기름으로 둘러쌌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다윗은 이 짧은 묘사를 통해 인간 내면의 부패와 외면의 오만을 동시에 언급합니다.
마음이 기름으로 둘러싸였다는 표현은 감각이 둔해지고 자각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여지를 모두 막아버린 그래서 더 이상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그것이 다윗이 두려워한 악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말로써 교만을 드러냅니다.
말이란 단순히 생각의 반영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된 통로이기에 말이 교만하다는 것은 그 존재 전체가 이미 하나님을 외면한 위치에 서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다윗은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을 토로합니다.
그는 자신이 애워싸여 있고 그들이 땅에 쓰러뜨리려 눈을 치켜뜨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장면은 단지 육체적인 위협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고립과 불안의 표현으로 읽힙니다.
아무리 자신이 의를 지키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자 애썼다 하더라도 현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짓밟으려 한다는 무력감이 이 고백 속에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때때로 그 믿음 때문에 더 깊은 싸움 속으로 던져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배웁니다.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이 포위된 감각은 믿음의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바가 세상 안에서는 언제나 소수의 목소리로 남고 그 목소리는 종종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침묵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말하게 되는 그 마음.
신앙이란 어쩌면 끝없는 고립과도 같은 감정을 감내하는 일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다윗은 급격하게 기도의 어조를 바꿉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그를 대적하사 꺾으소서.”
이 외침은 단지 원수를 향한 저주의 언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수단이 무력해진 자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기 판단을 맡기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보복으로 갚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회복해달라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가운데 다시 세워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시편 곳곳에서 반복되는 신학적 긴장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언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개입하시는가.
우리 역시 동일한 물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지금 개입하지 않으십니까.
왜 악인은 형통하고 정의는 지연되며 진실은 왜곡되고 거짓은 권력을 잡고 있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대해 즉답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놓지 않음으로써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응답을 받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오지 않을 때에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고요한 고집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여호와여 이 세상에서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모두 누린 이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의 쾌락과 성취가 전부인 사람들과의 분리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성공이 부럽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받은 몫이 너무 커서 그 부유함이 자녀에게까지 이어질 만큼 풍족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다윗은 한 걸음 물러섭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삼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몫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가 고백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것은 앞선 모든 고통과 억울함, 부당한 상황들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신앙의 정점입니다.
다윗은 이 땅의 현실이 불의하고 무너져 있으며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궁극적인 만족이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데에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종말론적인 위로에 그치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를 되묻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만족은 어디에서 오는가.
삶의 끝자락에서, 아니 오늘 하루의 마지막에,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우리 내면을 채우고 있는가.
다윗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그 얼굴이면 충분하다고.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에게 가장 충만한 만족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저는 이 고백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게 됩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이 구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설명으로는 옮겨지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믿음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종류의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란다는 이 고백이 지금 이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때로 말의 끝이 아니라 시선의 전환으로 완성됩니다.
시편 17편의 결미(結尾)는 바로 그런 장면을 그려냅니다.
다윗은 온갖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의 교만과 폭력을 상세히 묘사한 끝에 마침내 한 문장을 남깁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짧은 고백은 그 어떤 응답이나 해결보다 더 근본적인 안식의 언어로 다가옵니다.
더는 반론이나 해명이 필요 없는 자리, 바로 그 얼굴이면 되었다는 고백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토록 치열하게 붙들고 있는 고통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끝났을 때 결국 나를 채우는 마지막 한 조각은 과연 무엇일까.
다윗은 그 마지막을 아주 단순하고 정결한 말로 정리합니다.
“주의 얼굴을 보리니… 만족하리이다.”
이 문장은 설명되지 않고 다만 살아 있는 신앙의 직관 속에서만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얼굴, 곧 하나님의 존재와 시선, 그의 인격적 임재를 말하는 이 고백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깊고 본질적인 갈망을 드러냅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삶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수록,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확고한 것을 붙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외적인 안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가 자신의 만족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영적인 위안이 아니라 신앙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이때 “의로운 중에”라는 표현이 아주 조심스럽게 따라붙습니다.
이는 스스로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온 진실함의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입을 지켜내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어온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그 길 끝의 문장입니다.
그 길이 때로 외롭고 험하며 때로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걸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시선, 그것이 바로 ‘주의 얼굴’입니다.
또한 “깰 때에”라는 시간적 표현은 이 고백이 단지 현실 세계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깬다’는 말은 수면에서의 각성일 수도 있고 더 근원적으로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암시하는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이 땅에서의 문제들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당장의 회복이나 응답을 넘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이 자신의 진정한 만족이 될 것이라는 고백으로 기도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자기점검이 아니라 믿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묻는 영적인 재정비의 요청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도구로 삼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이 시편의 마지막은 하나님이 목적 그 자체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얼굴, 그 형상, 그 시선—그것이면 족하다는 담백한 고백이야말로 모든 기도의 끝에서 가장 빛나는 결론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은 기도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기도란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향한 여정이며 응답이 오지 않아도 그 얼굴을 기다리는 일 자체가 믿음의 행위입니다.
다윗이 말한 “만족하리이다”는 감정이 아니라 결정이며 상황이 아닌 관계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결정과 확신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도는 삶을 바꾸기 전에 시선을 바꾸는 일입니다.
억울함은 그대로일 수 있고 상황은 변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두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정한 믿음의 자리입니다.
이제 이 시편을 덮으며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가.
나는 어느 얼굴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리고 오늘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선뜻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다윗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조용히 따라 읊어봅니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 말이 언젠가 나의 고백이 되기를 아니, 오늘부터라도 서서히 나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의 끝에 조용히 마음을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