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르짖었더니 그가 들으셨다

시편 18편을 묵상하며

by 참지않긔






어느 날 문득, 낯선 외로움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내 영혼을 어루만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찾아와 스스로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그 조용한 고요 속에서 불현듯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로다.”

시편 18편의 그 첫 문장은 마치 먼 길을 돌아 다시 찾아온 이름처럼 내 안에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처음부터 내 마음에 위로로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표현들은 내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장엄하게만 들렸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시편을 멀리했습니다.

거기 담긴 언어들은 마치 나의 작고 연약한 믿음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반석과 요새, 방패와 산성이라는 표현들은 어떤 견고함과 확신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도 자주 흔들렸고 너무도 자주 낙심했으며 그 믿음이라는 이름조차 부르기 힘든 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이 시편 앞에 서게 되었고 이 장중한 언어들 속에서 나의 기도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작고 여려 보일수록 이 시편의 언어는 나를 대신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도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구절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너무도 직접적이고 너무도 생생한 절박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망의 줄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고 조용한 파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내 안에 자라던 죄의 뿌리들, 해결되지 못한 상처의 그림자들, 그리고 반복되는 좌절과 침묵.

그 모든 것이 저를 조용히 조이던 줄이었고 때로는 그 줄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던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 절망 속에서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준비된 기도, 신학적으로 정리된 간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듣지 않아도 좋으니 무너지는 마음이 더는 말없이 침잠하지 않도록 토해낸 숨결 같은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부르짖음을 기억합니다.

말이 되지 않아도, 형식이 없더라도, 너무 많은 감정이 얽혀 있어서 어떤 단어도 이를 설명할 수 없었던 순간.

그 순간 하나님을 향해 올린 그 한숨과 눈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깊은 신앙의 언어였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라는 말은 시인의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회복이 단번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에는 기다림과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부르짖은 그 순간부터 응답을 받기까지의 시간은 분명 길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하나님의 응답은 시인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표현을 ‘응답’보다는 ‘들으심’이라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사실, 그분이 거기 계셨다는 그 단순한 진술이야말로 그 어떤 해결보다도 먼저 우리를 살리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들으심은 때로는 상황의 변화로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응답은 지연되거나 아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으심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귀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 내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확신, 그리고 침묵 가운데에도 존재하고 계셨다는 그 위로의 체험입니다.

저는 이 시편을 읽으며 그런 하나님의 ‘들으심’을 묵상합니다.

변화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거기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응답은 종종 우리가 상상했던 방법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삶에 다가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는 불이 나왔으며 하늘이 진동하고 구름이 감쌌다고 노래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과장된 신화적 이미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표현들 속에서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의 실재를 봅니다.

그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절망과 공포 속에서 간신히 붙잡은 신앙의 형상이자 스스로의 언어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찼던 구원의 기억을 담아내기 위한 시인의 몸부림입니다.




신앙의 체험은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하나님의 현존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으며 논리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불꽃과 구름, 지진과 천둥이라는 이미지로 하나님의 임재를 노래합니다.

저는 이 구절들을 통해 한 인간이 그토록 거대하고도 다정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너무 크고 너무 압도적이어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가까이 다가오셔서 내 숨소리를 들으시는 분.

하나님은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 크고도 섬세한 분이셨습니다.

지금까지의 묵상이 이 시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다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시며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항상 우리가 바라는 방식과 시점으로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 조용해서 알아차릴 수 없고 때로는 너무 낯설어서 의심부터 앞섭니다.

저는 시편 18편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이 불꽃처럼 찬란하게 내려오는 장면에 놀라기도 하지만 정작 제게 깊이 각인되는 것은 그 모든 서술의 뒤편에 조용히 머물고 있는 ‘들으심’의 장면입니다.

시인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자기 성전에서 그의 음성이 울렸다고.

이것은 어떤 기적보다도 더 근본적인 위로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기 이전에 이미 들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들으심이 곧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였다는 이 단순한 진술이야말로 상처 입은 자에게는 가장 강력한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가끔은 천둥처럼 요란하고 가끔은 이슬처럼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그가 높은 곳에서 나를 붙드시며,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높은 곳’이라는 표현은 단지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기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시선을 상징합니다.

그 높은 곳에서 손을 내미셨다는 말은 그분이 초월적 권능으로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신앙의 고백이자 동시에 그 높음을 기꺼이 낮추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시는 하나님의 겸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는 이 표현은 단순히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를 넘어서 절망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졌다는 영적 이동의 은유로 읽히기도 합니다.




저도 삶 속에서 이러한 손길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격렬하지 않았고 극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조용히, 아주 깊이 제 삶의 결을 바꿔놓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위로로는 다다를 수 없던 내면의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머물러 주셨던 그분의 존재는 지금도 제 믿음의 중심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확신이 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응답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대신 ‘함께 하심’으로 응답하시고 그 응답은 말보다 더 크고 더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시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저는 이 표현 속에 담긴 따뜻한 위안을 오랫동안 곱씹습니다.

‘넓은 곳’이라는 단어는 단지 공간적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억눌림 없이 호흡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하는 듯합니다.

좁고 어두운 내면의 감옥에서 벗어나 새로운 빛과 바람이 있는 곳으로 이끌리었다는 고백.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셨기에 구원하셨다는 이 단순한 진술은 제게 큰 위로를 줍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존재 자체로 기쁨이 되어주는 이 사랑은 이해할 수 없기에 더 깊이 다가오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시편 18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의로웠다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명확하게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일까요?

다윗은 누구보다도 복잡한 생애를 살았고 때로는 명백한 죄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담대히 자신이 하나님의 도를 지켰고 율례를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은 단지 윤리적 무결함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기를 선택한 방향성’에 대한 증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로움이란 죄 없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죄를 직면하고도 하나님께로 계속 나아가려는 그 마음의 방향을 뜻하는 것 아닐까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스스로가 부족함을 알고 때때로 실망스럽기까지 한 내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전히 그분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전부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의로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이 의롭다고 고백한 것은 교만의 표현이 아니라 회개의 삶과 하나님과의 끈질긴 동행 속에서 얻은 용기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백을 받으시고 그런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은 이어서 전쟁의 이미지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시인의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높은 곳에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고 민족들 위에 우뚝 서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전쟁의 이미지를 현실의 전투로만 읽기보다는 영혼이 겪는 깊은 내면의 갈등과 고난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싸움을 겪습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싸우고 일어나기 싫은 아침과 싸우며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 싸웁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무릎 꿇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발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암사슴의 발처럼 단단하게 세워주시고 우리의 내면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높은 곳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편의 전쟁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고통과 의심, 두려움과 회의, 반복되는 후회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침묵으로 받으시고 때로는 아주 선명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며 우리의 고난 속에서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은 우리를 다시 세우시며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의 본래 위치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넘어졌던 자는 넘어진 자를 부축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다시 일어섰던 자는 또 다른 이의 손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는 나의 등불이시라.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이 고백은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깊습니다.

하나님은 등불이십니다.

그 등불은 세상을 환히 밝히는 태양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아주 작고 개인적인 내 발걸음 앞을 겨우 비출 만큼의 빛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빛이면 충분합니다.

그 빛 하나로 우리는 방향을 잃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며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등불은 우리 삶의 전부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 발걸음을 옮기게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는 사이에 우리는 구원의 여정을 완주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감사의 노래로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여호와는 살아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구절은 모든 여정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입니다.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던 시인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노래합니다.

무너졌던 자가 다시 세워졌고 길을 잃었던 자가 다시 빛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이 찬양은 단지 과거의 구원에 대한 감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전히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심을 믿는 현재형의 고백입니다.




시편 18편의 마지막 부분을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하나의 길을 따라 멀리 걸어온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고통의 언어가 있었고 이어서 간절한 외침이 있었으며, 그 외침은 들리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단지 문제의 해결로 끝나지 않고 한 사람의 내면 전체를 바꾸어 놓는 깊은 은혜로 확장되어갑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보다 더 넓은 곳, 즉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깊어졌다는 증거이며 기도가 삶의 중심에서 형성된 하나의 고백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시편 18편은 단지 개인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있었던 두려움과 고난이 하나님의 손을 거쳐 어떻게 노래로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묵상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언제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가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이 한 줄은 그 긴 여정 전체를 요약하는 진술이자 시편 전체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나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그 근원부터 다시 흔들립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을 넘고 나의 자격을 초월합니다.




이 고백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지만 동시에 자유로워집니다.

나의 의로움이나 성취, 믿음의 강도를 기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원하셨다는 그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진리가 우리를 다시 일으킵니다.

그래서 다윗은 민족들 위에 세워졌다는 구절을 자신의 위대함의 증언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나를 통해 드러났다는 사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역사 안에 쓰였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이 시편의 마지막 고백이 더욱 깊고 잔잔하게 울리는 이유입니다.




이제 시편 18편의 마지막 구절로 다가갈 때 우리는 하나의 믿음을 다시 부여잡게 됩니다.

“여호와는 살아계시니.”

이 선언은 단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선 한 인간의 고백입니다.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며 그분을 자신의 반석이요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이 고백은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시대를 거쳐 이 시편을 붙들었던 이름 모를 사람들, 그들도 이 고백 안에서 눈물지었고, 다짐했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는 살아계시고 그분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이 믿음은 설명할 수 없는 밤을 견디게 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상처를 다독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시편의 고백은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언어이며, 마음의 진동입니다.

저는 이 시편을 읽고 또 읽으며 한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지나 믿음의 언어를 말하게 되었는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고백이 내 입술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구원은 설명으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것임을 배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묵상은 늘 말로 시작하지 않고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꺼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왜 나였는지, 왜 그렇게 오래 침묵하셨는지를 묻지 않고 대신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붙드심이 내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만큼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그 확신이 흐려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편 18편은 다시 제게 다가와 이 진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나를 기뻐하셨고, 그분은 나의 소리를 들으셨고, 그분은 나를 높이셨습니다.

나는 그 고백 위에 서서 오늘도 한 걸음 내디딥니다.




이 시는 끝이 났지만 묵상은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여전히 걸어가는 중입니다.

삶의 굴곡을 지나며 다시 무릎 꿇는 시간들이 오겠지만 그 모든 자리에서도 이 시편은 변함없는 노래가 될 것입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산성이시고,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나의 어두운 밤을 끝내 밝히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믿음의 언어를 말합니다.

아주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 당신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면, 저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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