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버튼을 누르기까지 내 몸은 이미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그잔은 늘 쓰던 것.
입구가 아주 조금 깨졌지만 손에 익었다.
그 손맛이라는 건,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충성심처럼 작용한다.
새것보다 낡은 것에 마음이 먼저 간다.
물은 그리 오래 끓이지 않는다.
그 사이 나는 양치를 하고 거울 앞에 선다.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얼굴이 거기 있다.
눈 아래는 자꾸만 어두워지고 입꼬리는 평소보다 덜 올라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하고 나를 설득한다.
설득은 대개 정답이 아니라 필요로부터 시작된다.
물이 끓는다.
소리는 크지 않지만 부엌의 침묵을 잘게 부순다.
김이 피어오르고 손에 감기는 머그잔의 온기는 내가 아직 살고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걸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살아 있다는 말은 언제나 잠정적이다.
그 물은 아무 맛도 없다.
입에 넣어도, 목을 타고 내려가도 맛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따뜻하다.
온도만 있다.
그게 다다.
나는 그 ‘다다’가 충분하다고 믿기로 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다.
어떤 것들은 이유 없이 계속된다.
예를 들어, 깨진 컵을 매일 쓰는 일.
같은 길로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 앉고, 같은 말투로 인사를 건네는 일.
그리고 아주 오래된 이름을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일.
20년쯤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기억은 스스로 몸을 감춘다.
하지만 어떤 얼굴은 시간보다 먼저 말을 건다.
그는 웃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론 그럴 권리도 없었다.
우리는 말을 아끼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보다 말을 마시지 않는 쪽을 선택한 두 사람.
이상하게 편했다.
불편한 말보다는 편한 침묵이 낫다.
말이라는 건 어쩌면 너무 자주 실패한다.
오히려 침묵이 그 사람의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물을 끓였다.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어딘가 달랐다.
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달라졌다는 감각이 있다는 것.
나는 그 작은 이질감에 오래 붙들렸다.
살아가는 일에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반복이 있다.
우리는 그 반복을 삶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날은 그 반복이 나를 구하고, 어떤 날은 그 반복이 나를 덮쳐 온다.
물은 끓고 나는 그것을 마신다.
그 안에 무엇도 넣지 않는다.
넣지 않음으로써 지켜지는 온도가 있다.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 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오래 남을 때가 있다.
슬픔을 말로 옮기면 거기서부터 슬픔이 줄어들기 시작하니까.
나는 그 줄어듦이 아까웠다.
물을 끓이면서 나는 잠시 사람이 된다.
누군가의 것이었고, 지금은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작은 존재가 여전히 뭘 끓이고 있다는 사실.
살아 있는 일은 어쩌면 뜨거운 것 앞에 잠시 멈추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