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편을 묵상하며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시편 20편을 들으며
아침의 공기가 아직 어둠과 빛 사이에서 망설이는 시간, 나는 문득 무의식처럼 한 구절을 마음속에 끌어안았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처음엔 그 말이 너무도 익숙하고 평이하게 들려 그냥 지나쳐도 괜찮겠거니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 말이 조용히 뒤따라와 내 발목을 부드럽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날도 특별한 감정도 아닌 그 아침, 그러나 마음 한 귀퉁이가 어딘가 텅 빈 듯 말 못 할 외로움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기에 환난이라는 단어는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환난은 단지 커다란 재난이나 눈에 보이는 재앙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고 묵음 속에 숨은 일상의 균열 속에서도 찾아오는 것이기에 그 말씀은 마치 오래전 누군가로부터 받은 손편지처럼 아무 말 없이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문장을 품고 조심스럽게 하루를 열면서 나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내 안에 있는 나를 불러보았습니다.
주님,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제겐 환난의 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어도 분명 제 영혼엔 알 수 없는 무게와 어두움이 내려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저는 무엇을 바라며 서 있는 걸까요?
무엇을 향해 손을 뻗고 있으며 어떤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쌓아왔던 기도들은 어느새 내 입술을 한 바퀴 맴돌다 흩어졌고 간절함은 언젠가부터 망설임으로 바뀌어 기도는 종종 멈춤이 되었고 무릎은 뜨거움 없이 꺾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런 나를 향해 돌아보게 하는 거울처럼 다가왔습니다.
단순한 한 문장, 그러나 모든 철학적 질문과 신학적 해석을 넘어 “응답하신다”는 이 다섯 글자는 묵직하게 내 안을 울렸고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소리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침묵으로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침묵 속에도 여전히 그분의 뜻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시편이 다윗의 시이며 전쟁을 앞두고 백성들과 함께 부른 노래라는 사실이 다시금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절박한 현실 앞에서 무기를 손에 들기보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이 기도는 그 어떤 전략보다 위대한 믿음의 무기였음을 나는 다시 배웁니다.
병거와 말, 눈에 보이는 힘과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 하나만을 자랑하는 이들의 고백.
이것은 단지 옛 사람들의 믿음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믿음이 매 순간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다시금 울려 퍼지는 노래였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빠르고 잔인해질수록 우리는 더 빠른 말, 더 튼튼한 병거를 요구받고 더 높이 쌓아올리는 이력과 숫자들에 나를 걸게 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점점 흐려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마음, 그 이름으로 살아가던 고요한 결단입니다.
시편은 그런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는 누구를 자랑하며 무엇을 의지하느냐고.
병거도 말도 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는 자의 고백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갑옷이 된다는 이 진리는 나를 다시 주님 앞으로 데려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는 더 이상 도와달라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는 나는 설 수 없습니다”라는 그 어떤 언어보다 본질적인 영혼의 탄식이었고 절박한 신뢰였습니다.
나는 다시금 내 마음을 열고 묻습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그 많은 것들은 정말로 주님의 뜻 안에 있습니까?
소망이라 부르며 품고 살아온 계획들이 실은 내 뜻으로 가득 찬 것이진 않았습니까?
그 질문은 내 안 깊은 곳을 건드렸고 말씀이 비춰주는 거울 앞에서 나는 내 진심이 얼마나 복잡한 의도와 욕망으로 얽혀 있었는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께 드리는 간구 속에 숨겨져 있던 이기적인 바람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고 겸손해 보이던 언어들은 속을 들춰보면 자주 자신을 위한 계산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원을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 앞에 이르자 나는 오히려 말이 멎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이루어짐이 나를 정말 살아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나를 흩어뜨릴 위험이 되는 건 아닌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조용히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기도의 입을 닫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이 침묵 속으로 이끄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말보다는 귀를 여는 쪽으로, 요구보다는 신뢰하는 쪽으로, 응답을 재촉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천천히 젖어가는 쪽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이제 기도는 내가 하는 말이 중심이 아니었고 나의 원함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존재의 깊은 자리에 조용히 주님의 말씀 앞에 나를 앉히는 일이 되었고 그 앉음 자체가 하나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을 때 시인은 이렇게 부릅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이 간청은 분명 다윗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지만 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자연스레 이어졌습니다.
그분은 모든 기도의 완성이며 환난의 길을 먼저 걸으신 분이시고 우리가 도저히 감히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우리를 담대히 인도해주신 구속의 길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니 시편은 더 이상 고대의 전쟁 찬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복음의 언어로 울려 퍼지는 새로운 시가 되었습니다.
병거도 말도 없지만 그 이름 하나만으로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앞에서 나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평안으로 채워졌음을 조용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란 결국 나를 드러내는 고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을 택한다는 뜻이며 나의 하루하루를 그 이름 안에 머물게 하는 선택입니다.
시편 20편은 오늘도 여전히 나에게 말을 겁니다.
그 고요한 말씀 속에서 나는 다시 기도를 배우고 다시 주님의 이름을 더듬어 부릅니다.
침묵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기도가 결국 내 삶 전체를 다시 말씀의 자리로 이끌어주는 은총임을 감사함으로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