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2편을 묵상하며
기도는 언제나 준비된 마음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날, 입술은 무언가를 향해 열리지만 말은 영혼에 닿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맙니다.
시편 22편을 펼쳤던 날도 그랬습니다.
익숙하게 반복되어 온 말씀 속에서 뜻밖에도 한 구절이 제 안에 머물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미 알고 있던 문장이었지만 그날은 뜻을 안다는 것이 마음으로 아는 일과 얼마나 다른지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백은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체계적인 신앙의 언어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이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때 마음이 짐작으로만 전해지는 자리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 아님에도 그분의 얼굴이 멀게 느껴지는 감각은 신앙의 여정 안에서도 어쩌면 가장 깊은 통증인지도 모릅니다.
그 날 저는 처음으로 믿음이란 하나님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용기임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이 단지 다윗의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는 십자가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됩니다.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고 계시던 예수님의 입에서도 이 구절이 흘러나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라는 극점의 고통 앞에서도 예수님은 이 시편을 택하셨습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 뼈아픈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며 그분은 다윗의 언어를 빌려 아버지께 당신의 심장을 드리고 계셨습니다.
이 시편은 예수님의 피 묻은 기도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이 시는 고대의 노래가 아니라 복음의 심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절규를 선택하셨지만 그 절규는 곧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왜’라고 묻는다는 것 그 자체가 아직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으니까요.
믿음을 잃은 자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짖는 자만이 침묵의 무게를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듯한 그 순간에조차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시의 용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는 정돈된 문장이 아니라 무너지는 마음에서도 흘러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이 시편에서 배웠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자학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수치와 조롱, 고립과 외면 앞에서 무너져내린 자아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런 심연 속에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돌릴 수 있다면 그 시선 하나로 다시 기도는 시작됩니다.
시편 22편은 끝없는 침묵과 외면 속에서도 하나님을 불러내는 용기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침묵은 여전히 깊지만 시인은 기억을 끌어올립니다.
“주는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고, 젖을 먹을 때부터 나의 하나님이셨나이다.”
현재가 깨어졌을 때 그는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손길을 떠올립니다.
믿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오래된 뿌리 위에 서 있습니다.
지금이 허물어질 때 우리는 기억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만납니다.
과거를 신앙의 지지대로 삼을 수 있다면 현재는 견뎌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침묵에서 찬양으로 바뀌기까지의 길고 느린 순례와도 같습니다.
시인은 마침내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감정이 회복된 것도 아니지만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더는 ‘왜’가 아니라 ‘당신은 누구이신가’를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찬양은 응답의 결과가 아니라 기억의 회복이며 부서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그 기도는 혼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이제 민족을 향하고 세상의 모든 족속을 향해 열려 갑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 앞에 예배하리니.”
이 고백은 예언이 아니라 찬양의 확장입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탄생한 노래가 회중의 예배로 번지고 온 열방을 덮는 예배의 리듬으로 피어오르는 이 흐름은 기도가 가장 멀리 닿을 수 있는 경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한 구절. “그가 이를 행하셨도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어떤 사유도 어떤 분석도 이 한 문장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고통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았고 침묵은 더 이상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이 시편의 마지막 절과 완벽하게 겹칩니다.
침묵은 응답이 되었고 절규는 찬양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한 문장을 가슴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를 행하셨도다.
이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충분함은 오늘도 제 믿음을 다정히 붙들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