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가뜩이나 고단한데 굳이 극장에서까지 심각한 주제를 마주하고 영혼까지 어둑어둑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날 극장을 찾았던 마음가짐도 그랬다.
뭐,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저 팝콘이나 입에 넣으며 머리를 텅 비우고 낄낄댈 수 있는 그런 영화 한 편을 골라보자는 심산이었고 한국 영화가 만든 초능력물이라니 ‘한국에서 초능력? 설마...’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머릿속에 먼저 들어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비웃음 반, 가벼운 기대 반으로 착석했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몇 장면이 채 지나지 않아 터져 나온 웃음 탓에 그 어설픈 냉소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진지한 척하는 영화가 넘쳐나는 시대에 강형철 감독은 다시 한번 유쾌함이라는 칼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돌아온 것이다.
'과속스캔들'이나 '써니'를 통해 시대와 세대를 절묘하게 관통하는 유머를 선보였던 강형철 감독답게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에서도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전면에 내세우며 관객을 쥐고 흔든다.
무겁고 비장한 할리우드 히어로물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애초부터 "우리 그냥 웃자"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목표만을 설정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 흔한 히어로 영화의 틀을 빌려왔지만 초능력이 펼쳐지는 무대가 골목길 구멍가게, 동네 치킨집, 심지어 요구르트 배달용 전동카트라는 설정부터가 이미 할리우드식의 '쿨함'을 기가 막히게 뒤집는 발칙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가 내놓은 ‘초능력의 획득 경로’라는 설정 자체가 범상치 않다.
장기 이식을 받은 뒤 느닷없이 초능력이 나타난다는 터무니없는 전제는 시작부터 웃음을 참을 여지를 박탈하고 들어간다.
영화는 마치 초능력 영웅물의 정석을 따르는 척하다가도 관객들이 그 허술함을 즐기고 있음을 간파한 듯 한없이 능청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끝까지 달린다.
심지어 등장인물들의 초능력 역시 어딘가 모자라고 찌질하다.
강력한 슈퍼히어로의 위엄과는 정반대로 생활밀착형, 혹은 그저 짠내 가득한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만의 매력 포인트가 된다.
물론 이 작품의 CG는 정교하거나 세련된 맛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 관객은 그 점을 지적하며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미덕은 거기서 발휘된다.
이는 과거 주성치가 '소림축구'나 '쿵푸허슬'에서 의도적으로 현실감을 파괴하고 웃음의 극한을 추구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전략이다.
지나치게 진지한 CG를 동원했다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은 퇴색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소 허술하고 촌스러워 보이는 CG조차 감독의 철저한 계산하에 연출된 장치로 보이며 덕분에 관객은 마음 놓고 ‘병맛’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강형철 감독답게 음악의 활용이 탁월하다.
주인공들이 초능력을 발휘하는 순간마다 절묘하게 터져 나오는 배경음악들은 순간적인 폭소를 넘어 영화를 본 뒤에도 귀에 잔상처럼 남는다.
요구르트 전동차와 'Never gonna give you up'이라는 명곡의 조합이라니, 처음 듣자마자 웃음이 새어나오면서도 묘한 중독성을 일으키는 이 절묘한 센스에 나는 그저 “감독님, 이건 좀 책임지셔야겠는데요”라고 푸념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캐릭터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안재홍과 유아인은 기막힌 콤비네이션으로 영화의 코믹한 리듬을 완벽하게 잡아준다.
안재홍의 특유의 어수룩함과 유아인의 찌질하지만 어딘가 카리스마 넘치는 묘한 매력의 조합은 서로 절묘하게 대조되면서도 호흡이 빈틈없이 맞아 떨어진다.
그 중에서도 ‘탱크보이’라는 캐릭터는 기막힌 작명 센스와 함께 ‘박지성’이라는 이름의 선택에서 축구 팬은 물론 축구를 전혀 모르는 관객까지 웃음을 참기 어렵게 만든다.
사실 이 영화가 지닌 개연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우연히 초능력을 얻게 된 캐릭터들이 빌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영화는 자신이 던져놓은 떡밥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논리적 허술함이 영화의 매력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증폭시킨다.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개연성으로 긴장감을 더하려는 일반적인 히어로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웃기겠다'는 목적 이외의 어떤 진지한 의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뜻밖의 메시지를 슬쩍 던지며 품격을 유지한다.
그것이 바로 '연대'라는 주제다.
물론 그 연대라는 것도 미국식 영웅물의 장엄하고 비장한 버전이 아니라 한국식의 ‘웃픈’ 정서를 기막히게 녹여낸 형태다.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외치는 모습 속에서 관객은 익숙한 정서를 느끼며 오히려 위로받는다.
'하이파이브'의 속편이 제작될지에 대해서는 여러 현실적 이유로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찌질하고 사랑스러운 초능력자들이 다시 한 번 극장에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한국 코미디 영화의 부활 조짐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무거운 영화에 지친 당신이라면 그냥 가볍게 웃으러 가자.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개연성쯤은 무시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이파이브'는 그저 극장에서 당신의 유쾌한 웃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지금 한국 영화계가 제안하는 가장 상쾌한 해독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