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라는 제목은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다소 장르적 과장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첫 공개된 이후 불과 2주 만에 전 세계의 여러 세대와 지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그 어떤 수식어보다 더 분명하게 이 애니메이션의 힘을 입증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감상문을 남겼고 리뷰 영상과 팬아트가 SNS를 가득 메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하나의 리뷰를 쓰게 되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첫인상 이상의 것을 품고 있으며 한 번 보고 끝내기엔 너무 많은 잔향을 남기기 때문이다.
리뷰의 시작은 언제나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이렇게 흥행했을까?
단순히 케이팝이라는 트렌디한 소재 때문일까?
많은 관객이 입을 모아 말하듯 이 작품의 가장 큰 무기는 음악이다.
그러나 음악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음악이 70%라면 나머지 30%는 오히려 이야기의 ‘단순함’, 캐릭터의 ‘매력’, 그리고 디테일한 연출의 ‘깊이’에서 온다.
이 작품은 분명히 전통적인 디즈니식 100분 러닝타임 안에 아이돌물과 퇴마물, 청춘 로맨스, 케이팝 공연, 그리고 한국적 상징성까지 모두 욱여넣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AI가 짠 것 같은 스토리라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얇아 보이는 서사 속에 제법 촘촘하게 박힌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캐릭터다.
헌트릭스 3인방의 디자인과 개성은 물론이고 상대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사자 보이즈조차 마치 별도의 유닛 아이돌처럼 세심하게 설정되어 있다.
사실 이들이 제대로 된 서사 없이 ‘악역 아이돌’로만 소비될 수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이 사자 보이즈의 배경과 속내까지 궁금해하며 스핀오프를 원한다.
이 점은 단순한 캐릭터 소비가 아니라 캐릭터의 생명력이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헌트릭스 멤버들은 전형적인 ‘걸그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표정 연출만큼은 결코 아이돌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예컨대 루미가 진우에게서 문양이 들켰을 때 보이는 불안과 망설임, 미라와 조이가 루미를 바라볼 때의 복잡한 표정은 실사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떠올리게 한다.
평면적인 3D 캐릭터에게서 이토록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은 단순한 모델링과 렌더링 기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제작진이 디즈니급의 러닝타임에 맞춰 얼마나 많은 컷을 ‘표정’ 하나에 투자했을지 상상해보면 이 애니메이션이 지닌 숨은 공력이 드러난다.
두 번째로는 음악이다.
사실상 이 작품의 음악은 ‘국가가 허락한 마약’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다.
‘Golden’, ‘Your Idol’, ‘What it Sounds Like’ 등 메인 OST가 가진 힘은 단순한 귀에 맴도는 멜로디를 넘어 곡 하나하나에 담긴 메시지와 극 내 스토리를 교차시키며 서사적 깊이를 더한다.
많은 팬들이 지적했듯이 ‘Golden’은 마치 모든 걸 극복하고 반짝이자는 듯한 희망을 노래하지만, 극 중 캐릭터들이 처한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Your Idol’은 그런 ‘Golden’을 비웃는다.
‘내게 오면 모든 걸 해결해주겠다’는 사자 보이즈의 무대는 그 자체로 케이팝의 화려함 뒤편에 도사린 어두운 그늘과 소비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지막 ‘What it Sounds Like’는 모든 허울을 벗고 ‘부서진 유리조각에서도 아름다움을 본다’며 캐릭터들의 상처와 화해를 동시에 노래한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특징을 생각하면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개연성의 빈틈은 사실상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본다.
‘노래가 곧 전개다’라는 방식은 뮤지컬 영화의 전통적인 문법이다.
‘겨울왕국’을 비롯한 디즈니 작품들에서 이미 보았듯이 음악이 극의 클라이맥스를 대체하고 감정선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장면들은 논리적 개연성을 넘어선 감정적 납득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를 K-로맨스와 K-드라마의 문법과 결합해, 어쩌면 어색할 수도 있는 설정을 일종의 ‘한국적 뽕맛’으로 흡수한다.
특히 루미와 진우의 서사는 많은 시청자에게 납득할 듯 말 듯한 아쉬움을 남겼다.
루미의 문양이 상징하는 소수자성, 그리고 진우의 희생은 전형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주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직접적인 ‘키스’나 노골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이 작품이 가진 클리셰의 역전이다.
샐린이 루미의 문양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장면은 부모가 자식의 결핍을 끝까지 포용하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을 닮았다.
루미는 남에게 기대어 자신의 상처를 덮지 않는다.
스스로 싸워야만 한다.
이 불친절한 결말은 오히려 이 작품이 무대 위 화려한 K팝으로만 읽히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복선이다.
여기에 일부 관객은 이 작품이 시리즈물로 확장될 가능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분명 이 100분의 러닝타임은 수많은 설정과 뒷이야기를 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루미의 부모 세대 이야기, 진우가 지닌 400년의 시간, 사자 보이즈의 기원, 그리고 헌트릭스 멤버 개개인의 사연은 이제 겨우 예고편처럼 스쳐갔다.
그래서 많은 팬이 ‘이 작품은 파일럿 같다’고 평하며 차라리 10화 이상의 연작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물론 이는 제작사의 의도된 선택일 수도 있다.
한 편으로는 K팝이라는 소재의 폭발력을 최대한 단기간에 응축해 화제성을 만들어야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음악과 무대 연출, 액션 시퀀스에 예산을 집중해 ‘장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더 현명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사자 보이즈의 무대’는 빌런의 곡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퀄리티로 연출되었고 그 덕분에 관객은 오히려 빌런의 무대를 응원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
악역이 주인공 못지않게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단순한 원칙을 ‘Your Idol’은 완벽하게 증명해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이 가진 ‘서사의 빈틈’은 필연적이었다.
수많은 팬들은 루미가 왜 갑자기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었는지, 진우가 왜 갑자기 희생하고 영혼을 넘겼는지, 사자 보이즈의 정체와 동기, 선배 데몬헌터스의 존재감 등 수많은 물음표를 남겼다.
그러나 이 의문들은 정답을 요구하기보다는 일종의 ‘여백’으로 작용했다.
모든 것을 과잉 친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관객이 각자의 이야기로 메울 수 있도록 열어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팬은 불친절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고 어떤 이는 이런 빈틈 덕분에 스스로 수많은 해석을 만들 수 있었다며 작품을 더 애정하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루미의 ‘문양’이다.
이 문양은 처음엔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빼앗는 저주이자 낙인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팬들은 이 문양이 단순한 주술적 상징을 넘어 현대 사회 속에서 숨겨야만 했던 소수자성, 혹은 가족이 남긴 상처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진우가 루미의 문양을 덮어주는 장면은 연인이 연인의 결핍을 덮어주는 제스처이면서도 동시에 ‘너의 약점을 봤지만 받아들이겠다’는 은유로 읽힌다.
그러나 마지막에 샐린이 그 문양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결말은 그 모든 해석에 반하는 현실적 메시지를 던진다.
사랑이든 가족이든, 모든 상처를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는 냉정함.
이 모순은 이 작품의 서사가 단순한 왕도 히어로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 복잡한 메시지를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축은 무대 연출이다.
케이팝 아이돌물로서 이 작품은 무대 의상과 안무, 조명 연출까지 현실 아이돌 시장의 문법을 섬세하게 빌려왔다.
초반 스카이다이빙처럼 무대에 등장하는 오프닝은 현실성보다는 상징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팬들은 “낙하산 없이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웃으면서도 동시에 ‘아이돌은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존재’라는 비현실적 환상을 그 장면에 이입한다.
‘Golden’ 무대에서 헌트릭스 멤버들의 의상이 안팎의 색이 다른 이유는 숨겨진 마음과 드러난 마음을 대비시키기 위함이라는 분석은 이미 유명하다.
시상식 무대에서 루미만 색을 달리한 것은 그녀가 여전히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침내 ‘What it Sounds Like’에서 모두가 같은 흰 의상으로 무대에 서는 순간, 관객은 그동안의 오해와 상처가 화해로 수렴되었음을 무의식적으로 납득한다.
스토리의 빈틈을 무대와 의상이 채워주는 순간이다.
이 작품의 압도적 음악과 연출이 만들어낸 ‘짧은 뽕맛’은 그래서 일부 팬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많은 이들이 말했다.
'차라리 시리즈였다면.'
실제로 넷플릭스, 소니 모두 이 성공을 이어가고 싶을 가능성이 크다.
진우는 죽었지만 마지막 파란 빛으로 영혼을 남기며 부활의 떡밥을 남겼고 루미의 부모 세대 이야기는 프리퀄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혹은 사자 보이즈와 헌트릭스가 협력해 더 거대한 적과 싸우는 후속 시나리오도 팬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수십 개의 2차 창작으로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리즈화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점도 많은 팬들이 예감한다.
지금의 성공은 음악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곡, 새로운 무대를 만들지 못한다면 2편은 1편의 명성을 갉아먹는 ‘양산형’이 될 위험이 높다.
또한 1편에서 압축해버린 설정을 다시 풀어낼 때 지금과 같은 짧고 강렬한 몰입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 자체가 모험이다.
결국 2편이 성공하려면 지금의 ‘음악-액션-아이돌-한국적 요소’라는 네 축을 모두 더 높은 밀도로 다시 빚어내야 한다.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 첫 편은 그 가능성을 증명해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해외 관객에게는 ‘케이팝’을 넘어서 ‘한국 문화’ 자체를 하나의 멋진 판타지로 소비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통 무당 의상과 부적, 한복 모티프, 목욕탕 장면(비록 고증 오류가 있지만), 그리고 ‘오빠!’라는 한국어가 더빙조차 유지되는 디테일은 한국 문화가 그 자체로 장르적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한국계 해외 팬들이 “드디어 한국이 디즈니 애니처럼 만들어졌다”며 감격했다는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한 ‘아이돌 애니’가 아니라 케이팝이 가진 전 지구적 소비 구조, 그리고 그 화려함 뒤에 있는 개인의 고독과 상처, 이를 덮어주는 무대의 장치들까지 통째로 드러낸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작품은 과연 명작인가?
아니면 잘 만들어진 유행 상품인가?
나는 이 물음에는 쉽게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명작이 되기엔 분명 결이 얇고 구조가 단순하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유행 상품으로만 보기에는 장면 하나하나에 스며든 정성과 상징성이 아깝다.
어쩌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명작과 유행 상품의 경계 그 어딘가에서 케이팝이라는 장르가 늘 그래왔듯 완전히 새로운 혼종의 길을 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란 무엇인가.
때로는 스크린 위에 흘러가는 장면 그 자체로 전부를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장면 너머의 결핍으로 인해 더 많은 이야기를 품어내기도 한다.
넷플릭스가 내놓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후자에 가까운 작품이다.
케이팝이라는 빛나는 소재를 등에 업었지만 그저 무대 위의 조명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 눈부신 무대가 끝나고 남겨지는 긴 잔향, 그 잔향을 통해 관객 스스로가 빈틈을 채워나가는 경험이야말로 이 작품이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일지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문득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로만 규정짓기가 망설여졌다.
무대 위 아이돌의 군무처럼 정밀하게 짜인 군무 안에도 흔들리는 마음이 있고, 자막으로 번역되지 않는 표정 하나에도 복잡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듯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장르라는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듯 보였다.
퇴마물이자 아이돌물이며, 케이팝 뮤지컬이자 한국적 민속 판타지라는 이 모호한 정체성이 의도적으로 공들여 세공한 허구 같으면서도 현실의 케이팝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나 익숙한 듯 보이지만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그것, 바로 환상으로서의 대중문화.
가장 먼저, 이 작품을 지탱하는 단단한 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음악이다.
음악이 없다면 이 영화는 반쪽도 채 못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음악 그 자체라기보다는 음악이 장면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그리고 음악이 때로는 이야기의 빈틈을 어떻게 기꺼이 덮어주는지, 그 교차가 이 작품의 숨결이다.
첫 곡 ‘Golden’에서 시작해 ‘Your Idol’을 지나 마지막 ‘What it Sounds Like’로 나아가는 일련의 흐름은 그저 OST 트랙리스트라기보다는 한 편의 각본이자 해설서에 가깝다.
‘Golden’이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반짝이며 올라서라, 그 길 위에 황금빛 무대가 기다린다.
그러나 무대 위 아이돌은 누구도 완벽히 빛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각자의 어둠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이 작품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Your Idol’은 오히려 ‘Golden’을 비웃는다.
네가 빛나고 싶다고? 그러면 나에게로 와라. 너의 고민과 결핍 따위는 내가 대신 삼켜주마.
사자 보이즈의 무대가 화려할수록 그들의 노래가 선사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독이다.
음악이 곧 서사이고, 서사가 음악에 의해 무너지고, 다시 봉합된다.
이런 다층의 구조는 한 번 보고 흘려보내기엔 아깝다.
그래서인지 많은 관객들이 이 작품을 두세 번씩 돌려보고, 노래를 다시 틀고, 가사를 곱씹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것을 받쳐주는 건 결국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헌트릭스 3인방은 전형적인 걸그룹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표정과 몸짓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의 평면성을 초과한다.
루미는 무대 위에서만 반짝이는 존재가 아니라 문양이라는 저주 혹은 낙인을 짊어진 채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외로운 투쟁을 이어간다.
그가 무대를 떠나 진우와 나누는 시선, 서로에게 손을 내밀 듯 내밀지 못하는 그 짧은 순간들이 오히려 거창한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표정 연출의 세공은 실로 놀랍다.
지하철 신에서 싸움을 끝내고 걸어나가는 미라와 조이의 눈길, 루미가 문양을 들켰을 때 살짝 흐트러지는 눈빛, 무기를 겨누다 망설이는 손.
이 모든 것이 실사 배우의 미세한 근육 떨림처럼 살아 움직인다.
요즘 시대에 디지털 캐릭터에게 ‘연기가 좋았다’는 말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촌스럽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 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물론, 그 모든 빛나는 순간에도 이 작품은 빈틈을 남긴다.
설명되지 않은 디테일이 많다.
루미가 왜 문양에도 불구하고 귀마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진우는 왜 모든 걸 던져 희생하는 길을 택했는지, 사자 보이즈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심히 흘려보내면 어쩌면 단점일 수도 있는 허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더 길게 붙잡아둔다.
영화를 다 보자마자 그 빈틈을 두고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커뮤니티에는 수십 가지 해석과 떡밥 정리가 올라온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시리즈였어야 했다’는 탄식이 동시에 이 작품이 허술하지 않다는 반증이 된다.
실제로 이 애니메이션은 러닝타임 안에 담을 수 있는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백억 원이 들어간 제작비가 단순히 화려한 군무에만 쓰였을 리 없다.
음악과 무대 연출, 액션 시퀀스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설정은 일부러 비워두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단순함을 ‘AI가 짠 듯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거꾸로 스토리가 복잡해졌다 한들 이 작품이 가진 가장 중요한 덕목인 속도감과 몰입감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스토리로 설득하는 대신 무대 위에서 단 한 번의 고음을 터뜨리듯, 음악과 장면이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케이팝 그 자체와 닮아있다.
케이팝은 곡 하나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무대와 안무, 의상과 팬덤 문화가 맞물려야 비로소 빛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 원리를 충실히 가져온다.
낙하산 없이 떨어져 내리는 초현실적 오프닝, 무대 의상의 안팎 색깔로 마음의 닫힘과 열림을 표현한 디테일, 마지막 무대에서 흰색으로 하나가 되는 합창.
모두 케이팝 무대가 그러하듯 메시지는 말로 직접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의 눈과 귀를 자극하고, 그 잔향으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많은 팬들이 말한다.
진우는 정말로 죽은 걸까.
아니면 영혼의 파란 빛은 후속작의 예고일까.
루미의 부모 세대는 어떤 비밀을 품고 있었을까.
사자 보이즈는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프리퀄로 파고들 수도 있고 시퀄로도 확장할 수 있는 떡밥은 이미 충분하다.
다만 문제는 이 작품이 만들어낸 기대치를 그대로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다.
후속작이 나온다면 음악은 어떻게 다시 그 정점을 찍을까.
다시 한번 ‘국가가 허락한 마약’ 같은 노래를 쏟아낼 수 있을까.
1편이 가진 뽕맛을 유지한 채, 이번에 비워둔 설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채워낼 수 있을까.
결국 이 숙제는 이 영화가 스스로에게 남긴 과제다.
나는 생각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명작인가?
아니면 잠깐 반짝이고 사라질 상업적 상품인가?
명작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솔직히 더 많은 완성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품이라고만 부르기에도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고민과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케이팝이 늘 그래왔듯, 이 작품은 스스로를 다 쓰고 버려지기를 거부한다.
수많은 리믹스, 커버댄스, 팬픽과 2차 창작으로 이어지며 어쩌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시작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다.
무대 위에서 늘 완벽한 척하지만 무대 뒤에서 부스러기처럼 흘리는 진짜 마음들.
그 모순을 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싸움을 이어가는 아이돌들.
그들의 얼굴을, 그들의 표정을, 그들의 노랫말을, 우리는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남긴 가장 큰 힘이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자리에도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영화가 끝난 뒤에도 무대는 계속된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탄생부터가 하나의 질문이었다.
케이팝이란 무엇인가.
무대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 칼군무와 그 완벽함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무대 뒤에서 흘리는 땀과 눈물과 상처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 질문에 대한 한 편의 우화이자 뮤지컬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답을 굳이 장황한 대사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무대 위의 노래와 무대 밖의 침묵, 그 두 가지의 간극을 조용히 남겨둔다.
이 작품이 케이팝 팬덤뿐 아니라 전혀 K팝을 몰랐던 해외 관객에게까지 낯설지 않게 다가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K팝이라는 장르는 늘 글로벌과 로컬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해왔다.
한국의 전통성과 글로벌 팝산업의 문법이 뒤섞여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 허황되지 않음을 증명해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로 빼어나게 번역해낸다.
한복의 문양, 무당의 부적, 귀마라는 존재, 그리고 서울 지하철이라는 구체적 로케이션이 케이팝 댄스와 EDM 사운드, 아이돌 팬덤의 형광봉과 같은 요소와 조금의 어색함 없이 섞인다.
관객은 낙하산 없이 공연장으로 내리꽂히는 헌트릭스를 보고 피식 웃으면서도 동시에 ‘저 비현실적인 오프닝이야말로 케이팝의 본질’이라고 납득한다.
과장된 듯 과장되지 않은 이 경계는 한류 콘텐츠가 지난 십수 년간 축적해온 감각이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단순한 연출력이나 무대 미술의 공력만은 아니다.
이 애니메이션이 품은 더 깊은 층위는 ‘소리’에 있다.
케이팝의 성패는 결국 한 곡의 파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무척 솔직히 고백한다.
‘Golden’이 흘러나올 때 관객은 스토리의 허점이며 장면의 연결고리를 잠시 잊는다.
귀로 들어온 리듬이 모든 논리를 덮는다.
그리고 ‘Your Idol’로 넘어갈 때 우리는 다시 무대가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래 하나가 내러티브를 뒤엎고 스토리를 다시 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곡들이 단순히 좋은 팝송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사 하나하나가 영화 안에 중첩된 서사의 파편으로 작동한다.
‘모든 걸 황금으로 만들겠다’는 찬란한 약속은 정작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너의 아이돌이 되어주겠다’는 달콤한 속삭임은 실은 너의 마음을 삼켜 공허를 만들어내는 귀마의 주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What it Sounds Like’는 찢겨진 마음이 모여 깨진 유리조각 속에서도 다시 빛을 본다는 이야기로 다시금 그 모든 클리셰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표면의 스토리와는 별개로 오히려 케이팝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메타 비평으로 확장된다.
빛나야 하는 사람, 숨겨야 하는 상처, 환호의 무대 뒤의 공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는 음악의 마법.
아이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소비될 이미지’가 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 과정을 적당히 미화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그저 무대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관객에게 선택을 맡긴다.
결국 관객은 질문을 받는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인가.
루미의 문양은 그녀의 상처인가,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드는 힘인가.
사자 보이즈는 빌런인가, 혹은 또 다른 아이돌인가.
진우의 희생은 사랑의 완성인가 혹은 남은 자들을 위한 비극의 씨앗인가.
이 질문들에는 뚜렷한 답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자꾸만 다시 재생된다.
답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시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해석을 위해서.
넷플릭스와 소니가 이 프로젝트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케이팝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손쉬운 한국 콘텐츠 수출상품이다.
그러나 음원 스트리밍으로만은 더 이상 새로움을 주기 어렵다.
넷플릭스는 이를 이야기와 결합해 하나의 세계관으로 확장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IP로의 씨앗이다.
뒷이야기를 프리퀄로 혹은 스핀오프로 파생시킬 수 있고 사자 보이즈만 떼어내도 하나의 아이돌 유닛이 된다.
실제로 팬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사자 보이즈의 음원을 실제로 만들어달라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물론 이는 동시에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하다.
케이팝은 늘 속도가 중요하다.
새로운 곡, 새로운 무대, 새로운 팬서비스가 끊임없이 공급되지 않으면 열기는 빠르게 식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마찬가지다.
이번 1편이 남긴 기대와 상징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두 번째 무대가 더 화려하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작품은 결국 ‘그때 잠깐 반짝였던 것’에 불과했는가.
그래서 2편을 만든다면 감독과 제작사는 더욱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빈틈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여백을 더 남길 것인가.
사자 보이즈와 헌트릭스를 다시 한 무대에 세워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가장 중요한 건, 노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끝났다.
2편이 나와도 결국 관객이 재생 버튼을 누르는 이유는 스토리가 아니라 음악일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이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다만 이 불완전함이야말로 케이팝이라는 장르가 가진 본질과 가장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늘 빛나야 한다는 강박, 그러나 그 무대 뒤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내리는 그림자들.
그리고 그 그림자까지 하나의 퍼포먼스로 만들어내는 기술과 용기.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 모든 것을 무대 위에 올리고 마지막 커튼콜 대신 관객에게 무대를 건넨다.
끝나지 않은 무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후렴.
무대가 꺼져도 지워지지 않는 표정 하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 편의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 아닐까.
생각해보면 한국 대중문화가 지금의 위상을 얻기까지 그 길은 언제나 혼종과 뒤섞임의 역사였다.
케이팝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종종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세계적 그룹을 먼저 떠올리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혹은 그보다도 더 전에는 트로트와 가요무대가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흥미로운 것은 이 애니메이션이 표면적으로는 최신형 케이팝의 번쩍이는 이미지에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안쪽에 숨겨둔 뼈대는 훨씬 오래된 한국 대중문화의 기억을 닮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무당과 귀마, 그리고 부적과 같은 모티프는 얼핏 보면 단지 신선한 한국적 ‘포장지’처럼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는 한국 대중서사에서 반복되어온 ‘혼과 몸의 분리’를 다룬 오래된 이야기 구조와 맞닿아 있다.
한국의 귀신담은 늘 억울함과 못다 한 말이 서린 혼령 이야기였고 무당은 그 못다 한 말을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신의 경계에서 풀어내는 매개자였다.
루미가 자신의 문양을 숨기려다 결국 들키고 진우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무당이 무대 위에서 춤으로 혼을 달래는 의식과도 닮아 있다.
결국 헌트릭스라는 걸그룹은 아이돌이면서 동시에 무당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악귀를 쫓아내고, 스스로의 상처도 돌본다.
아이돌이 영혼의 노동자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소비되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농담을 아주 직설적으로 서사로 옮겨왔다.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가 곧 퇴마의식이라는 설정은 처음엔 다소 억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 모순이 매혹적이다.
이 모순은 이 작품이 한국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다.
한국적 소재는 낯설지만 그 안에 담긴 ‘무대 위의 가면’이라는 메타포는 전 세계 관객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결국 무대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존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루미가 무대에서 노래할 수 없게 된 이유가 ‘목까지 차오른 문양’이라는 시각적 상징으로 그려진 것도 이중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물리적 저주인 동시에 내면의 죄책감과 거짓말이 만들어낸 심리적 봉쇄다.
그래서 어떤 관객은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가 평면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관객은 이 빈틈을 통해 훨씬 많은 은유를 발견한다.
둘 다 틀리지 않다.
서사가 단순하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동시에 그 단순함을 어떻게 덮고 넘어갈지를 음악이, 안무가, 표정이, 무대 연출이 대신한다.
디즈니나 픽사가 만들어온 전형적인 가족 애니메이션 문법을 한국이라는 배경과 K팝이라는 무기를 통해 변주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형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시험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은 애니메이션 산업에 있어서 늘 아쉬움을 품어왔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장르적 왕국을 건설하고, 디즈니·픽사가 가족 서사의 왕도로 군림하는 사이 한국은 뛰어난 작화나 하청 기술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 색’을 가진 완성도 높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바로 그 지점을 정면 돌파한다.
케이팝이라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내세워 전 세계 OTT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자신을 시험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돌파 방식은 정면승부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틀기’다.
전통 무속과 현대 아이돌을 겹쳐놓고 무대 위 군무와 퇴마의식을 하나로 묶고 빌런조차 아이돌로 만든다.
정통적인 영웅서사 대신, 표면은 왕도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결말의 한 귀퉁이는 어색하게 비워둔다.
샐린이 루미의 문양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마지막 장면이 그 예다.
관객은 익숙한 클리셰를 기대하지만 영화는 끝내 그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이 어색한 문틈이 사람들로 하여금 ‘왜?’라는 질문을 계속 붙들게 만든다.
지금도 커뮤니티 곳곳에서 루미의 부모 이야기를 프리퀄로 다루자는 제안, 사자 보이즈의 과거와 귀마의 기원을 다룰 수 있다는 상상, 진우가 정말 죽었을까 하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OTT가 원하는 이상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단일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으로 이어갈 수 있는 서사적 기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완벽한 계획 아래 짜인 세계는 아니지만 어쩌면 이 느슨함이야말로 케이팝 팬덤과 닮았다.
완벽한 서사보다는 오히려 무대 뒤에서 직접 상상하고 서사를 덧붙이는 2차 창작이 팬덤의 핵심이듯 이 애니메이션도 같은 문법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질문으로만 완성될지 모른다.
그 질문의 형태는 음악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귓가에 남아 다시금 재생 버튼을 누르게 하는 것.
관객이 남긴 커버 댄스 영상, 커뮤니티의 떡밥 해설, 무대 의상의 색상을 분석하는 스레드까지, 영화가 끝난 뒤에야 진짜 공연이 시작되는 듯한 풍경.
그것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남긴 가장 독특한 유산이다.
이제 이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라기보다는 다소 허술할 수밖에 없는 1막의 리허설로 남는다.
그리고 그 리허설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다시 커버 영상으로, 다시 스트리밍으로 무한히 이어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케이팝이라는 이름이 가진 가장 무서운 지속성이다.
언젠가 누군가는 이 이야기의 두 번째 막을 열 것이다.
그때 또 다른 무대에서, 또 다른 노래가, 또 다른 그림자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노래를 한 번 더 틀고, 다시 무대 뒤의 어둠을 상상할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무대는 그렇게, 결코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