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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감각들

by 참지않긔


잠을 잤다. 일어났다. 무언가를 먹고 일을 했다. 다시 잠들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생존을 위한 순환 구조처럼 조용히 이어지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처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지쳐서인지, 세상이 달라졌는지, 아니면 내가 변한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조차도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명확한 건, 점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아프다 해도, 어디에선가 큰일이 났다 해도, 스스로 놀랄 만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슬프지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사람은 생각보다 빠르게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걸 나는 내 안에서 확인했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다독이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무감각은 그저 무감각일 뿐이었다.

고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괜찮은 상태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침묵의 또 다른 이름.

문제는 이 감정의 결핍이 삶을 견디게 해주는 동시에 모든 의미를 앗아간다는 데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면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않게 된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고 실망하지 않으면 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천천히 정리되었고, 절제되었고, 단정해졌다.

감정의 주름이 펴지고 욕망의 밀도가 희미해지고 생존이라는 최소 단위만이 남았다.




오래전에는 좋아하던 것들이 있었다.

문장, 소리, 이미지 같은 것들.

그러나 지금은 그것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더는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읽지도 않는다.

간혹 무언가에 손이 가는 순간이 있긴 하다.

그러나 곧 멈춘다.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흥미를 잃고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무언가를 재생하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꺼버린다.

어떤 장면은 흐릿했고 어떤 음악은 무의미했다.

재미없는 게 아니다.

그냥 아무런 느낌이 없다.

감정이라는 기제는 작동을 멈췄고 나는 그 결핍의 결과로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묻는다.

요즘은 뭐에 빠져 있냐고. 요즘은 뭘 하냐고.

나의 대답은 짧고 무의미하고 때로는 정직하지 않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열정을 잃는 건 실패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누군가는 말했고 또 누군가는 그러려면 삶이 너무 길다고 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무감각의 실체를 정확히 설명해주진 않았다.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꺼졌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다시 타오를 가능성은 멀게만 느껴졌다.




매일 퇴근 후에는 나름의 보상을 시도한다.

카페에서 평소에는 절대 시키지 않을 작지만 비싼 것들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 가지 않는다.

금방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감정을 달래려는 소비는 잠시의 위안일 뿐이고 결국 텅 빈 방 안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낡은 침대와 조용한 라디오, 충전 중인 핸드폰, 바닥에 엎어진 책, 쓰다 만 문장들.

이 조용하고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는 생존한다.

살아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상태로.




무감각이 단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였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기대하고 싶지 않아서, 뭔가를 열망하다 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반응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그렇게 스스로를 잠그는 동안에도 세상은 계속 움직였다.

새로운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헤어졌고 뉴스는 매일 새로운 재앙을 전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조차도 내 삶을 흔들지 못했다.

나는 내 감정의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다.

방공호는 어둡고 조용하며 안전했지만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은 무엇을 잃었을 때 그 빈자리를 통해 존재를 실감한다.

나는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만지며 살아 있다는 걸 어렴풋이 감지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한 번쯤은 다시 타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나는 질문을 반복했고 그 질문조차 차갑게 식어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내가 여전히 분노할 수 있다는 사실.

사소한 불공정함이나, 반복되는 거짓말, 비겁한 권위에 대한 반응.

그것은 불편했고 반가웠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던 상태에서 분노는 일종의 온기였다.

살아있다는 증거. 희미한 불씨.

어쩌면 나는 끝까지 무감각해지지 못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나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아직 남아 있는 불씨를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고.

감정의 명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더라도 불편함과 피로 속에서도 그 사소한 반응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끔은 아주 짧은 글을 쓰고 오래된 음악을 다시 틀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귀를 메모장에 남긴다.

그런 행위들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라 언제 다시 불꽃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무감각은 지옥이 아니다. 그러나 지옥과 닮아 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무 편안하고 안락하다는 점에서.

나는 이 조용한 지옥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타오를 작은 불씨 하나를 위해, 지금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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