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기로디라는 이름은 사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꽤 오래전, 그의 '호수의 이방인'을 보고 나서 꽤나 불편한 감정이 남았던 기억이 있다.
그 불편함이 단순한 불쾌함이 아니었기에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었던 영화였다.
그 이후로 그에 대한 관심이 끊긴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그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고 나 역시 자연스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그의 신작 '미세리코르디아'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좀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반응했다.
‘이 사람 아직도 영화를 찍는구나’라는 감탄보다는 어쩐지 그 불편함을 또다시 마주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영화는 어디서도 구하기 힘들었던 작품이었고 OTT 플랫폼은 물론이고 극장 상영도 드물었다.
그러다 대전의 ‘소소아트시네마’라는 시민영화관에서 상영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갔다.
이 작은 극장에서 이런 영화를 틀어준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그날 내가 그 영화를 본 것은 마치 우연 같은 인연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내게 단순한 관람 경험을 넘어서 오랜 시간 붙잡히는 질문 하나를 남겼다.
자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신앙인으로서 그 자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이야기의 시작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하다.
제레미라는 남자가 은인이었던 제빵사 장-피에르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고향으로 돌아온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고향,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
마을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제레미가 느끼는 공기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마르틴은 장-피에르의 아내로 제레미를 받아들이면서도 어딘가 불편해하고 오랜 친구였던 뱅상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대사는 적고 시선이 말을 대신한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그 불투명한 기운들이 천천히 고조된다.
그리고 결국, 숲속에서 두 남자는 충돌한다.
말도 거의 없이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제레미는 돌을 들어 뱅상을 가격한다.
그 장면이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침묵과 장면 전환을 통해 ‘뱅상이 죽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더는 그의 모습은 나오지 않고 아무도 그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리고 제레미는 너무나 태연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물론 그는 시신을 감추고 흔적을 지우기 위한 행동도 잊지 않는다.
심지어 신부 필리프까지 그 은폐에 가담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평범한 스릴러와는 결이 완전히 달라진다.
필리프 신부는, 말하자면 굉장히 조용한 방식으로 제레미의 죄를 ‘돕는다’.
그를 직접 도운다기보다, 함께 있어주는 존재로 남는다.
말 없이 그의 편을 들고, 심지어 사건을 덮는 데 필요한 도움을 준다.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도 하고 거짓 알리바이를 완성하는 데 동참하기도 한다.
이 신부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으로 제레미를 바라본다.
단순한 목회자의 연민이 아니라 어딘가 복잡한, 어쩌면 은근히 감정적으로 얽힌 시선처럼 보인다.
이쯤에서 나는 신부의 행동이 과연 자비인지 스스로 묻게 됐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자비는 죄인을 감싸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죄를 죄로서 직시하고, 고백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필리프는 제레미의 죄를 묻지 않는다.
심지어 고해도 없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며 곁에 머문다.
그렇다면 이건 자비가 아니라 방조 아닐까?
나는 신앙인으로서 그런 질문 앞에 서면 늘 불편하다.
자비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가 죄를 저질렀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때론 죄인의 곁에 있다는 것이 마치 그 죄를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영화는 그런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고해성사 없이, 어떤 회개의 흔적도 없이, 단지 ‘곁에 있음’이라는 말만으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을까.
그건 자비라기보다 죄에 대한 무관심이거나, 아니면 감정적인 선택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리고 나서부터 영화는 더 이상 어떤 긴장감이나 추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차라리 ‘고요한 침묵의 범죄’가 어떻게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지를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뱅상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사라지고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공동체 속에서 지워진다.
마르틴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지내고 마을 사람들도 무관심하다.
모두가 그저 ‘뱅상은 떠났다’고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 과정은 무섭도록 덤덤하다.
너무 자연스럽게 사람 하나가 사라진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단순한 ‘자비란 무엇인가’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영화는 공동체 전체의 도덕 감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죄가 있었고, 사람이 죽었고, 누군가는 그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신부마저도.
공동체는 진실을 피하고, 거짓된 일상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방식의 평온이 과연 진짜 평온일 수 있을까?
특히 필리프 신부의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그건 선택된 침묵이고 도덕적 책임의 회피다.
그는 사제다.
그는 공동체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고, 죄를 죄라 부르고 회개를 이끌어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걸 내려놓는다.
왜일까.
제레미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를 인간적으로 연민했기 때문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런 연민이 진실을 외면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는 그 침묵이 너무 아름답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절벽 위에 함께 선 두 사람, 말없이 나누는 눈빛, 조용히 바람 부는 소리.
화면은 마치 그 순간이 사랑이나 용서처럼 보이기를 유도한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아름다움이라는 외피 속에 감춰진 침묵, 그 침묵이 감싸는 죄, 그리고 그 죄가 낳은 죽음.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
그건 어쩌면 죄보다 더 큰 폭력이 아닐까.
피해자는 사라지고 가해자만이 용서를 받는 구조.
공동체는 그런 식으로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나는 영화를 보며 계속 생각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신부처럼 침묵했을까 아니면 그 죄를 말했을까.
신앙인으로서 자비를 행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비가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자비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죄 그 자체까지 덮어버리면 안 된다.
사랑은 진실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진실을 품는 게 사랑이어야 한다.
영화는 끝내 어떤 대답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들은 내가 극장을 나온 후에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누군가의 곁에 선다는 걸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자비일 수 있을까.’
‘피해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란 과연 정당한가.’
영화는 이런 질문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심어놓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라나서 일상의 순간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미세리코르디아'는 굉장히 영리한 영화다.
감정을 크게 폭발시키지도 않고 도덕적 분노를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으면서 관객 스스로 윤리와 신념, 사랑과 자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나에게는 그게 이 영화의 진짜 힘이었다.
오히려 영화가 끝난 후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