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버스 정류장 지붕 위에 형광등이 하나 있었는데 몇 초 간격으로 깜빡거렸습니다.
불이 꺼질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불이 켜지면 어색하게 돌아왔습니다.
그걸 보면서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게 사실은 땅이 아니라 환상 같은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밑은 분명히 아스팔트인데도 마음속에서는 허공 위를 걷고 있다는 기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는 걸 가만히 보면 거의 다 어떤 막연한 기대에 이끌려 사는 것 같습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삑’ 하는 소리가 이어질 때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앞을 향해 걸어갑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라는 기대, 안정된 직장을 가지면 안전할 거라는 믿음, 사랑을 하면 완성될 거라는 희망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돈이 어떻게 행복을 주는지, 그 안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장하는지, 그 사랑이 어떤 모양의 완성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냥, 그렇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거겠지요.
신념이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진리와는 다른 자리에서 자라는 것 같습니다.
진리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고, 해가 뜨고 지는 일에는 믿음 같은 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환상이나 신념은 믿음을 먹고 살아갑니다.
믿음을 거두는 순간 금세 흩어져버릴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신념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환상이 사람을 움직이는 거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환상이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환상에서 나오기도 하니까요.
수많은 환상들 가운데서도 제일 큰 힘을 가진 건 결국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려한 보석이나 맛있는 음식보다도 어떤 얼굴 하나, 목소리 하나가 더 오래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나 동경, 때로는 충성이나 복종 같은 게 사람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닐까요.
어제도 그랬을 것이고, 오늘도 그러할 것이고, 아마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어떤 얼굴, 어떤 이름, 어떤 목소리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게 실체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그 불확실함이 저를 움직입니다.
환상은 진리가 아니지만 삶을 버티는 데는 충분히 힘이 됩니다.
며칠 전 자판기 앞에서 동전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습니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동전은 기계 밑으로 굴러 들어가 버렸습니다.
몸을 숙여도 닿지 않아서 결국 음료를 사지 못한 채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남은 건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동전으로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소한 만족, 이를테면 미지근한 캔커피의 당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환상도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잡히지 않지만 그 놓친 감각이 오래도록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 말이지요.
사람들은 환상에 속지 말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속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우리 삶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막연한 기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희망 같은 게 결국 우리를 살게 합니다.
저는 가끔 진리보다 환상이 더 자주 저를 움직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멀리서 묵묵히 빛나고 환상은 가까이서 속삭이며 다가옵니다.
저는 그 속삭임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또다시 내일을 살아가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