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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끄트머리에서 느껴보는 과즙미

루피시아 8241. 포도우롱

by 미듐레어 Sep 22. 2025

벌써 일 년이 되어가는구나. 작년 오카야마에 놀러 갔을 때 구매해 온 포도우롱. 짧은 여행이었지만 다행히 역에서 가려던 고라쿠엔 사이에 백화점이 있고 그 안에 루피시아가 있어서 무난하게 들렀다 왔던 기억이다. 지역한정이라고 해도 온라인 직구에 손을 대고 나서부터는 온라인에서는 팔지 않는 몇몇 상품을 제외하곤 사실상 상시품목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그래도 매장에 들어갔는데 처음 보는 한정 상품이 있다? 그럼 일단 집어오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렇게 기념품 삼아 집어오게 된 포도우롱인데 이미 집에 있던 과일우롱을 이래저래 마시다 보니 어느덧 날이 차갑게 되어 다음 시즌으로 밀리고 말았던 포도우롱이다. 그런 데다가 올봄 오사카 그랑마르쉐에서 봉입으로 팔고 있길래 하나 더 집어와서 100g 보유자가 되었다. 덕분에 충분히 마셔보고 쓰게 된 시음기. 그러고 보니 작년 다카마스니 오카야마에서 집어온 지역 한정이 몇 개 더 있는데 아직도 시음기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는 그랑마르쉐에서 사 온 것만 시음기를 써도 연말을 넘길 것 같은데 너무 많은 종류를 쟁여둔 게 아닌가 싶어진다. 빨리 쓰고 빨리 마시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 마셔버리고 이제야 쓰는 포도우롱 시음기 시작. 오카야마 덴마야에서 한정 일러 캔입 50g에 1111엔, 오사카 그랑마르쉐에서 50g 봉입으로 780엔이었고 상미기한은 제조 1년. 다행히 작년에 사 온 배치가 제조일에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지역한정 일러캔에 안에도 라벨이 붙어있는 봉지가 들어있었다

루피시아에서 포도라고 하면 보통은 머스캣 종류의 포도향을 많이 떠올리게 되는데 머스캣이 아니고 부도, 그러니까 우리말로 포도라고 딱 이름이 붙은 과일우롱차다. 찾아보니 오카야마에는 피오네라고 하는 품종이 특산물로 껍질째 먹는 씨가 없는 포도이면서 우리나라의 거봉과 같은 사이즈와 식감인데 맛은 또 일반적인 포도, 비슷한 걸 찾자면 캠벨포도처럼 진한맛이 특징인 포도라고 한다. 아하 그래서.

오오츠부 부도오, 피오-네노 아마즈빳빠이 카오리오 사와야카나 후우미노 타이완 우우롱챠니 부렌도.
큰 알의 포도, 피오네의 달콤새콤한 향을 상쾌한 풍미의 대만 우롱차에 블렌드.

생각해 보면 포도향의 우롱차로 이미 퀸즈 머스켓 우롱이라는 좋은 상품이 있는데 피오네라는 품종으로 한번 더 승부를 보겠다는 취지니까 그쪽으로 기대감이 생긴다. 얼마나 다르길래.

말려있는 우롱차가 포도알같다

봉투를 열어 향을 맡아보면 폴라포 같은 찐득한 포도향이 코를 탁 치는데 확실히 머스캣보다 당도가 훨씬 진한 찐드으으윽한 향이 난다. 머스캣처럼 시원한 포도향이 아니고 달달해서 끈적한 느낌. 건엽을 덜어내니 역시나 포유가 동글동글 잘 된 우롱차에 의외의 토핑으로 콘플라워와 또 다른 꽃송이가 들어있는데 블루매로우 아닌가 싶다. 블루매로우는 그렇다고 수색을 파랗게 만들 정도로 들어있는 건 아니어서 수색보다는 아무래도 포도색을 이미지 하여 보랏빛의 꽃들을 넣어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 퀸즈 머스캣 우롱처럼 과육이 들어있거나 하진 않고 오로지 가향으로 피오네를 구현해 낸 듯하다.

포도-

확인해보지 않아도 확신의 아이스티 추천. 사실 급랭이냐 냉침이냐의 문제라고 하겠다. 5g의 찻잎을 500ml의 물에 넣고 하룻밤 냉장고에서 우려낸다. 녹진한 포도향이 달달하기 그지없는데 전형적으로 향이 너무 달아서 맛까지 달게 느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유형이다. 실제로 마셔보면 오히려 물질감이랄까 그런 것 외에도 맛 같은 건 연하고 부드러워서 너무 생수같이 슥 넘어가버린다는 느낌이 있다. 향이 진짜 검은색에 가까운 진한색의 포도 느낌으로 화려하고 섬세한 느낌의 머스켓과는 다르게 과즙미가 넘치는데 이게 입에서는 너무 쉽게 슥 넘어가버리니까 마시고 나서 아쉬운 감이 크다. 매일 오전 오백, 일 리터씩 막 원샷에 가깝게 들이키게 된단 이야기. 이렇게나 진한 인상의 향이 별 기억에도 안 남게 지나가는 게 아쉬워 급랭으로 전환해 봐도 우롱차를 워낙 부드러운 걸 쓰는지 딱히 차맛이 거칠고 짙게 올라오진 않고 전반적으로 냉침과 비슷한 결을 유지한다. 내 입장에선 차맛이 영 아쉬운 건데 누군가에겐 부드럽고 쓰지 않아서 좋다는 느낌일 수도 있지. 차맛 자체를 쓴 거라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더라고.

의외로 싱거웠던 대만우롱

여름이 끝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과일 중에 하나인 포도. 사실상 가을이 제철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 포도인데 묘하게 그 이미지는 여름과일이어서 늦여름의 정취를 끝까지 붙들고 있기 좋은 느낌이기도 하다. 사실상 청포도맛 음료나 아이스크림이 훨씬 흔한 세상에서 물론 일본의 지역 특산품종이긴 하지만 보라색의 그 포도를 따로 내주다니 고마운 일이다. 요 며칠 확 쌀쌀해진 아침이 오기 전까지 마지막 뜨끈한 아침 시즌을 포도우롱 냉침으로 잘 달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사 오자마자 마셨어도 참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작년 오카야마 여행이 자꾸 생각나고 아른거려서 마음이 좀 간지럽다. 지역한정도 잔뜩 사 왔는데 아는 맛의 가을차들을 마시다가 그대로 묵히고 있다. 그래서 내심 바보 같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맘때가 되니 갑자기 가을한정 과자들과 화과자들과 몽블랑이니 뭐 이런 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와구와구 먹고 사고했던 일들이 너무 그립달까. 슬슬 여름을 정리하고 가을로 넘어가는 마음이 되어가나 보다. 쥐어짜는 여름의 맛, 오카야마 한정 포도우롱,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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