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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Nov 07. 2023

생각보다 홍차이면서 영국의 아침이지만 어쨌든 녹차인

루피시아 8101. 지유가오카

루피시아 지유가오카 본점 한정상품 마지막 차는 바로 '지유가오카'이다. 지유가오카라는 동네의 상징성과 루피시아 본점이라는 상징성, 위엄, 무게감 뭐 기타 등등을 모두 더해서 이름조차 그 자체인 지유가오카 블랜드. 사실 제일 궁금했던 블랜드이기도 하고 (본점의 이름을 걸었다니까) 언젠가 본점에 가면 꼭 위층 올라가서 마셔봐야지 하고 있었던 블랜드인데 결국 이렇게 집에 앉아서 마시게 되었다. 거의 20년 넘는 세월 동안 가보고 싶었지만 루피시아에 직접 방문하게 되는 건 아마도 대부분의 차를 다 마셔본 후가 될 것 같다. (이미 상시품목에선 그때가 근접하고 있긴 한 것 같은데.) 아무튼 지유가오카 컬렉션을 모두 맛보게 해 주신 보부상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지유가오카 50g 캔입, 1150엔에 상미기한 1년.

적혀있는 모든것이 녹차를 외치고 있다.

굉장히 일반 은색 캔처럼 나왔지만 본점한정의 위엄이 서려있는 토파즈 누런색 캔에 녹색으로 클래시크하게 라벨이 붙어있다. 그림 따위 하나 없지만 디자인적으로 안정감과 만족감이 느껴진다. 그리드와 타이포그래피만 활용한 미니멀한 디자인에 좀 환장하는 스타일.

마로야카나 후우미 노 니혼 료쿠차 또 아싸무 코우차 오 부렌도. 수츠키리 또 시따 아마미 노 조우힌 나 아지와이.
부드러운 풍미의 일본 녹차와 아쌈 홍차의 블랜드. 깔끔한 달콤함과 우아한 맛.

1.5분으로 짧게 끓는 물을 사용하라고 되어있지만 100도 물로 삶았더니 그리 맛이 좋지는 않았다. 본점 가서 마셔도 한 김 식혀서 우릴 것 같은데. 아무튼 일본 녹차와 아쌈 홍차의 만남으로 동서양 전 세계를 아우르는 루피시아만의 뭐 그런 우리가 다 해 먹는다는 내용의 블랜드. 크으으 싸나이.

이때만 해도 당연히 저 아쌈이 CTC일거라 생각했다.

일본녹차와 아쌈 블랜드라고 하더니 이 정도면 블랜드가 아니고 아쌈이 토핑쯤 되는 것 같다. 확실히 녹차녹차한 블랜딩으로 아쌈은 CTC처럼 보인다. (반전 있음) 열자마자 녹차 특유의 김가루 냄새가 사아악 올라오면서 일단은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데 온도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건엽만 보고서는 정말 감이 안 오는 블랜딩. 아무래도 천천히 여러 온도에서 맛봐야 할 것 같다.

멋 좀 부려보겠다고 남은 로즈마리를 데코해봤는데 차 향을 다 잡아먹어서 사진 찍자마자 일단 싹 버리고 다시 시작

5g, 300ml, 75도에서 1.5분 우려낸다. 사진은 85도가량에서 우렸는데 그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어딘가 익숙한 향과 함께 수색도 꽤나 홍차에 가깝게 나와서 신기했는데 마시면 마실수록 어딘가 노스탤지어를 자꾸 자극한다. 이게 뭘까, 이 익숙한 향과 온도. 세 번째쯤 마실 때였나? 갑자기 떠오른 홍차생활 극 초반의 추억, 바로 포트넘의 브랙퍼스트 티백. 아아..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잊고 있었구나. 아니 근데 어떻게 녹차에 아쌈 조금 뿌렸다고 이렇게 잉브가 될 수 있는 거지? 아주 연하디 연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이다. 그저 웃음만 나온다. 나름 좋은 의미로 웃음이 나는 건데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야 말로 홍차의 근-본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가장~ 기본형의 홍.차. 인거니까. 물론 베이스가 녹차라는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맛과 향이 톡톡 튀어 오르 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잉브스러운 맛과 향에 녹차 같은 건 잊게 된다. 그래서 그게 제일 맛있었냐면 물론 그건 아니고. 본연의 블랜딩을 가장 잘 소화하는 온도는 위에 언급한 75도 근방인 것 같다. 비교적 저온에서 우려내자 고소하게 녹차의 베이스가 잘 느껴지면서 아쌈 홍차로 인한 서양식 풍미 또한 부드럽게 잘 녹아난다. 좀 더 녹차의 우마미가 강조된 연한 잉브 느낌. 이쯤에서 지유가오카 본점의 위엄이니 뭐니 그런 어려운 건 다 때려치운 지 오래다.

생각보다 멀쩡히 브로큰인 아쌈

엽저가 좀 충격적인데 CTC라고 생각했던 아쌈은 생각보다 큼직한 브로큰이고 일본녹차의 경우엔 뭘 얼마나 파쇄한 건지 거름망이 막힐 지경이다. 건엽에서 봤던 인상과는 정 반대인 대 반전의 현장. 일본녹차의 함유가 크다 보니 높은 온도에서는 가루 침전이 꽤 생긴다. 재탕은 거의 무조건 뿌옇게 수색이 나오고. 오히려 저온에서 다시백을 이용해서 우리는 편이 깔끔하고 재탕까지 마실 수 있는 방법이었다. 티백의 경우는 어떤지가 오히려 궁금하네. 다시백 없이 팟에서 직접 우린다면 무조건 한 번만 마시고 버려야 할 것 같다.

고급 티룸의 아주아주 프리미엄 블랜딩 느낌보다는 어지간한 호텔 로비에서 나름 격식을 갖춰 깔끔하게 마실 수 있는 느낌의 블랜딩으로 지유가오카의 분위기가 또 그런 쪽에 더 가깝나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직접 방문을 해봐야 정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기다려라 지유가오카. 언젠가는 꼭 방문할 테니. 지유가오카 시음기는 끗.

이것으로 초가을 행낭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꽤 많은 상품들을 장 봐주신 보부상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어찌 됐건 입동 전에 시음기를 다 마무리해서 정말 다행이다. 다음편부터는 무려 배대지를 통해 직접 받은 늦가을-겨울 패키지로 이어가도록 하겠다. 단풍이 와르르 떨어지고 밤송이가 구르고 고구마를 굽는 그야말로 겨울로 접어드는 차들을 준비해 두었다. Winter... is 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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