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150. 에카테리나
이번 늦가을 루피시아 직구를 서두르게 된 이유가 몇 개 있는데 일단은 기간, 수량한정이 걸려있는 몇몇 차들이 있었고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마시게 될 에카테리나였다. 일본 홍차협회였나 무슨무슨 협회에서 지정한 일본 홍차의 날이 바로 11월 1일로 홍차의 날 기념 뭐 그런 건 다 핑계고 내 지갑을 털기 위해 한정판을 또 내셨다는 소식이 루피시아 인스타에 9월인가 언제부터 걸려있었다고 한다. 비공개였던 상품이 짜잔 발표가 되었을 때 아닛 티백 온리잖아! 하고 실망을 하긴 했지만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했을 땐 또 살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그래서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티백 10개 캔입, 한정일러캔에 들어있으며 가격이 1500엔으로.. 이게 왜 이렇게 비싸야 하죠? 정말 지갑 털자고 나온 건가. 여기 있습니다 제 지갑. 상미기한은 넉넉하게 2년을 주었다.
에카테리나 블랜드는 일본인으로 러시아 표류를 했던 다이코쿠야 고다유가 당시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와 가졌으리라 생각되는 티타임을 모티프로 하여 만들어졌다. 일본인 최초로 홍차를 마셨다는 다이코쿠야 고다유와 아마도 황실 티타임에 초대하여 함께 홍차를 마셨을 예카테리나 2세의 모습을 뭐 일본풍과 러시아풍의 배경무늬와 함께 일러스트로 만들었다고 한다. 홍차라는 것이 폭발할 것 같은 일러스트. 피오니 잔이 꽤 멋지다.
와 코차 또 세카이 산다이 메이차 오 부랜도 시따 아마미 노 아루 유우가나 아지와이. 미루쿠티 모 우마이.
일본 홍차와 세계 3대 명차를 블랜딩 한 달콤하고 우아한 맛. 밀크티도 맛있.
와.코.차. 솔직히 주문할 땐 일본홍차 들어가는지 모르고 주문했는데 아니 왜 다 된밥차에 일본홍차를.. 세계 3대 홍차인 다즐링, 우바. 기문을 블랜딩 하였고 거기에 어떻게든 일본 홍차를 낑겨넣었다고 한다. 밀크티로 추천하기엔 풍미가 좀 약하지 않을까 걱정이긴 한데 개당 가격을 생각하면 작은 종이컵 하나가 안 되는 150ml가 안 되는 밀크티가 단가만 최소 2000원이라는 이야기이고 아마도 300ml 한 팟 분량을 만들려면 5000원 정도 들여서 희미한 밀크티가 되고 말 것이란 예상이 된다. 선생님들 저는 안될 것 같습니다.
평범한 루피시아의 삼각티백이 10개 들어있다. 티백용 분쇄를 보고 4종이상의 차를 비율을 맞춘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비싼 티백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마음으로 일본 홍차의 날을 기념해봐야 한다. 좀 더 감정이입을 해보기 위해 루피시아 창립 기념일인 것처럼 생각해 보자. 내가 홍차를 처음 마셔본 날이라던지. 근데 실제로 홍차를 처음 마셔본 게 99년 10월~11월 이 무렵이었을 테니 어랏? 이제 조금 기념할 맛이 난다. 거짓말 안 하고 그냥 흰 종이에 빨간 명조체로 홍차라고 쓰여있는 정체 모를 티백을 부모님 안 계신 빈 집에서 마셔본 게 처음이었지. 그때와 같은 모험심을 끄집어내어 어떤 비율의 블랜딩인지 모를 이 티백을 정성껏 우려내어본다.
티백 2개,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려내었다. 우려내면서 보니 권장 추출의 시간 범위가 1분이다. 보통은 2.5~3분 등으로 30초 범위를 주는데 홍차모음에서 1분의 텀이라니, 그만큼 다양하게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차인건지 뭔지 모르겠다. 일단은 거의 습관적 2.5분으로 우렸다.
수색은 그야말로 평범한 홍차의 색으로 기문이나 실론스러운 색에 가깝다. 한 모금 마셔보면 일단 다즐링, 기문, 우바가 각각 따로 놀아서 웃음. 수렴성은 그리 크진 않지만 또렷한 편이고 홍차의 풍미 또한 약하지 않다. 밀크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긴 한 것 같다. 다즐링, 기문, 우바의 블랜딩 비율은 그게 일단 뭐가 중요하냐는 듯 골고루 입안에서 뛰어노는데 주파수를 잘 맞추면 다즐링이었다가 기문이었다가 우바였다가 하는 감각이 정말 웃긴다. 무슨 라디오 전파 같은 인상이다. 그런데 이게 마무리가 너무 웃기는 게 그렇게 팽창하면서 골고루 느껴지던 홍차들이 어느 순간 한 가지로 확 수렴하면서 급 종료되는 여운이 있다. 가만히 혀를 곤두세워보면 분명 처음부터 빠르게 치고 나오는 단맛이 있는데 이것이 마치 피아노의 소스테누토 페달, 그러니까 가운데 페달을 밟은 것처럼 핑~ 하고 서스테인만 남겨두고 있다가 다른 차들이 한바탕 어우러지고 난 뒤에 여운 없이 멈춰 서면 그제야 빠르게 페달을 툭, 하고 내려놓는 듯한 인상이다. 경우에 따라선 이 와코차의 베이스를 각각의 차들이 다양하게 꾸며줬다가 사그라드는 탄산 같은 역할을 한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아깝지만 밀크티를 영 시도를 안 하긴 어렵겠지. 티백 2개, 150ml, 100도의 물에서 2분 45초쯤. 폼밀크 100ml를 차 위에 부어주었다. 색은 아주 밝고 연하게 되었다. 우유를 넣기 전에도 이미 쌍화탕의 느낌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상대로 밝은 색이랄까. 그래도 향이 꽤나 근사하다. 향만큼은 거의 로얄밀크티. 아닌 게 아니라 어디선가 묘하게 얼그레이스러운 향도 얼핏 비친다. 기문 쪽에서 나는 향인건지. 막상 마셔보면 역시나 연~하다. 맛과 풍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은 있지만 베이스티의 아로마는 어찌 됐건 잘 살아있는 게 신기한 부분. 티백을 하나 더 태웠더라면 정말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는 남은 티백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재탕은 300ml 물에 했는데 물맛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연한 차가 되었다. 재탕을 가려면 2분, 3분 연속으로 바로 우려 줘야 그나마 밸런스가 맞을 것 같다. 솔직히 한 번 마시고 버리는 게 맞겠는 것이 재탕에선 살짝 우바가 강세인 맹탕이라서 너무 다른 차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그러기엔 가격이...
루피시아는 일본을 정말 사랑하나 보다. 일본기업이 자국 사랑한다는 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가끔은 좀 과하다 싶을 때가 있어서. 게다가 가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전반적으로 꽤 맛있는 블랜딩이었기 때문에 오리지널 블랜드로 추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루피시아의 비가향 오리지널 블랜드가 라인이 엄청 넓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추가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어 보인다. 다만 가격만큼은 조금 더 합리적으로 내려와 주길 바란다. 허긴, 홍차를 처음 접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허들은 고등학생에겐 가혹했던 수입홍차의 가격이긴 했지. 홍차의 날을 맞아 이상한 부분에서 초심을 되찾은 좋은 경험이었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