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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Nov 17. 2023

달콤 상큼한 단풍놀이는 짧은 시기를 잘 맞추는 게 생명

루피시아 5596. 모미지가리

배대지 직구를 하게 만든 두 번째 사도. 내 지갑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모미지가리를 마셔본다. 붉을 홍, 잎 엽, 사냥할 수에 히라가나로 리 해서 일본어로는 모미지가리라고 읽는 단풍놀이라는 뜻의 홍차 블랜딩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단풍이 물드는 가을 무렵에만 판매하는 시즌 상품으로 은근 구매하기 까다로운 상품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차이기도 하지. 접할 기회가 너무 적어 포기하고 지내는 차 중에 하나이기도 한데 이젠 제가 가지려구요. 배대지 비용을 내더라도 데리고 오겠어요. 올해는 정말이지 타이밍을 잘 맞췄다. 봉입 50g, 750엔. 상미기한은 2년이다. 두 봉지 살걸.

모미지가리 이름도 귀엽기도 하지
링고 야 안주 노 카오리 노 코오챠 오, 아자야카 나 모미지 데 이로도리마시따. 아마주빠쿠 모 센덴 사 레따 아키 겐타이 노 아지와이.
사과와 살구 향의 홍차를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칠했습니다. 새콤달콤하고 세련된 가을 한정의 맛.

은유에 은유를 더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나름 직설적인 설명인데 개봉하기 전에는 아마도 그 의미를 절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과, 살구 가향이라는 과일향의 홍차이구나, 다엽 양이나 시간을 봐선 일반적인 홍차 범주겠구나 생각하고 빠르게 넘어가 보자.

개봉하는 순간 달달한 향이 용오름처럼 솟는데 애플사이다 같은 향이 폴폴폴 올라온다. 아주 진한 사과주스가 살짝 발효하면 나는 냄새 같이 올라오는데 카페 가면 많이 있는 골드메달 사과주스와 비슷하면서 좀 더 진하게 익은 향이 난다. 살구는 향으로는 잘 느껴지진 않고 약간의 뉘앙스만 있는 듯. 건엽을 살펴보면 이제부터가 진짜가 시작되는 느낌인데 빨간 사플라워 꽃잎 말고 또 다른 울긋불긋한 잎들이 보인다. 홍차라서 빨간 잎이 아니고 (이제 홍차 잎은 검은색이란 거 많이들 보셔서 아실 테죠?) 실제 단풍잎이 들어있다! 단풍으로 칠했다는 게 은유가 아니라고! 단풍잎을 우려먹는다고! 흔히 차 마시는 분들이 차 관리 잘못해서 향 날아가버리는걸 낙엽 됐다라고 표현하는데 이쪽은 표현이 아니고 실제 낙엽이 들어있습니다.. 머선 일이고. 찻잎은 인도와 베트남 원산지로 되어있는데 지난번 츠키니사쿠보단 분쇄도가 조금 덜 한 정도로 보인다. 아무튼 올해 단풍이 그닥 예쁘지가 않았다고 하는데 단풍은 여기서 다 봤네.

5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렸다. 가을가을한 기분을 이어 또다시 노란 찻잔. 사과향이 근사하게 피어오른다. 뜨거운 물에 몸을 풀고 나니 이제서야 존재가 드러나는 살구향. 마냥 달달하기만 한 건 아니고 나름의 수렴성도 꽤나 근사하게 혀를 감아준다. 그야말로 달달하면서도 과일의 산미가 느껴지는 훌륭한 가향차인데 이게 또 묘하게 과일잼에 가까운 뉘앙스로 가기 때문에, 그러니까 산미가 쏘는 느낌이 거의 없게 산뜻한 느낌이라 아이스로도 밀크티로도 모두 괜찮을 것 같은 오묘한 범용성을 보인다. 실제로 공홈에서는 아이스티와 밀크티 모두 추천하는 마크가 붙어있다. 애플밀크티라니 너무... 괜찮을까 싶지만 특유의 달달함만은 정말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밀크티를 시도해 볼 용기가 난다. 그전에 피칸이 올라간 타르트와 함께 가을의 정취를 좀 더 즐겨보자.

이것이 늦가을의 찻자리

우선 아이스티 먼저. 10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려서 얼음 가득한 티팟에 부어주고 다시 얼음컵에 따라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집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얼음 가득한 머그컵이 아니라 티팟이 되었는데 아무튼 정석적인 급랭. 아이스가 되면서 아무래도 수렴성이 좀 치고 올라오긴 한다. 건드려도 되는 건가 싶긴 한데 무려 포숑의 애플티와 비교하자면 이쪽이 조금 더 산미가 상큼한 느낌이 있다. 달달함도 모미지가리가 더 강하긴 한데 포숑이 좀 더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고 모미지가리는 아무래도 루피시아 특유의 풍선껌 느낌을 온전히 감출 순 없다. 잎을 잘게 부순 포숑 역시 우릴 때 양과 시간조절을 잘해야 하는 만큼 수렴성이 너무 강해지지 않게 잘 조절해야 하는 것은 양쪽이 비슷할 것 같다. 모미지가리의 아이스티는 애플주스를 마시는듯한 달달함과 사과의 산미가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아이스와 밀크티 모두에 어울리는 가향차는 아주 귀하다

10g, 300ml, 100도의 물로 3분. 중탕한 우유 120ml를 더해 밀크티를 만들어주었다. 설탕이 들어있지 않아도 충분히 향에서 달달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식으로 맛보기 위해 알룰로즈도 한 스푼 첨가. 맛은 충분히 달콤한 밀크티가 되었는데 사과향 우유, 살구향 우유라는 게 여전히 나에겐 심리적 장벽이 있다. 그 어딘가 막걸리의 느낌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니 또 나쁘지 않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제법 늦가을에 어울리고 단풍 가득한 산장 어딘가에서 마실 것만 같은 홍차라떼의 그림도 연상이 된다. 심리적인 장벽이 있어서 그렇지 밀크티로도 정말 훌륭하다. 스트레이트에서 수렴성만 잡아내고 향은 그대로 유지되는 게 모미지가리 밀크티의 그 어떤 미덕인 것 같다. 그냥 우유보단 밀크폼을 올려줘서 라떼느낌으로 마시는걸 더 추천.

그래도 잎이 꽤 자잘한 편이다

모미지가리의 가장 좋은 점은,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봉투를 열었을 때 올라오는 애플사이다 향인데 뉴욕주 북부 (upstate New York)에서 지냈던 시절 늦가을이면 사과농장에서 애플피킹하는 이벤트가 나름의 행복이었고 그래서인지 이 향을 맡으면 정말 가을이구나, 하는 실감이 순식간에 나는 바로 그 점이다. 그런 이유로 나의 가을 가향차 베스트인 모미지가리. 좀 아쉬운 건 모미지가리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의 단풍 시즌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점이다. 화무십일홍. 꽃이 길어야 열흘이듯 단풍도 길어야 2주 정도 그 화려함을 뿜어내고 그 뒤로는 아무래도 낙엽구경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날씨는 추위에 가속도가 붙어 금방 겨울차 시즌으로 넘어가버린다. 아쉬움을 간직한 채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진정한 시즌티의 면모까지 갖추고 있는 모미지기리. 마침, 이 시음기를 작성하는 오늘은 서울에 첫눈 예보가 있다. 창밖의 단풍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마지막 한번 분량의 모미지기리를 마저 마시러 가면서 시음기를 마무리한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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