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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Dec 29. 2023

크리스마스는 지나가고 이제 한 해를 정리하는 중이다

루피시아 5138. 오렌지 포맨더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있는 집안을 서성이다가 이제 때가 되었나 싶어 오렌지 포맨더를 꺼냈다. 루피시아의 크리스마스 티 특집으로 계속 소개했던 차는 flavored tea라고 적힌 가향차 라인이었는데 오늘 꺼낸 오렌지 포맨더는 original blend 라인이다. 찻잎에 직접 가향을 입힌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렌지 포맨더는 찻잎에는 가향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블랜딩 정보만 보고 이 차는 축제가 끝난 뒤 천천히 여운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골라두었다. 물론 재료의 조합은 충분히 크리스마스 티로 분류할 수 있는 조합이다. 아껴두었던 엥콜을 시작해 본다. 50g 봉입 750엔, 상미기한은 2년으로 11월~12월에만 파는 계절 한정이다.

오랫만에 보는 빨간 라벨

오렌지 포맨더는 오렌지에 정향(클로브)을 한 땀 한 땀 꽂아서 고슴도치처럼 만들어주는 장식으로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은근히 또 이게 징그럽게 생겼기 때문에 환 공포증이 있거나 하시면 찾아보지 않으시는 걸 추천. 트리에 장식하는 공모양의 오너먼트들의 원조격이라 하겠는데 자연건조한 오렌지와 정향에서 나는 향과 장식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후유 오 이로도루 '시아와세 오 요부 오마모리' 오 이메지 시따 코차. 호준나 다지링 니 쿠로부 또 오렌지 가 카오리마스.
겨울을 물들이는 '행복을 부르는 부적'을 이미지 한 홍차. 향기로운 다즐링에 클로브와 오렌지가 향기다요.

홈페이지 정보에 의하면 다즐링 세컨 플러시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시간도 약간 땡겨서 2분~3분으로 되어있다. 다즐링의 섬세함을 느끼고 싶다면 2분, 향신료가 깊게 우러나길 원하면 3분 쪽으로 맞추면 되겠다.

오렌지필과 생강조각이 비슷하게 보이는 컷팅

개봉해서 향을 맡아보니 시나몬과 정향이 달큰쌉싸름하다. 재미있는 건 확실히 톤이 확 다운되어서 뒤로 달아나는 향이다. 비슷한 향이었던 크리스마스 리스는 형신료들이 코로 날아와 박히는 굉장한 휘발성이었는데 오렌지 포맨더는 코로 빨아들이기가 한참 무거운 느낌이 있다. 건엽을 덜어내면 세컨 플러시 치고는 솜털이 아주 뽀송한 다즐링이 숭덩숭덩 썰려서 들어있다. 토핑에서 가장 많은 건 생강조각과 오렌지필이지만 시나몬도 꽤 들어있고 정향은 그리 많이 보이진 않는다. 나중에 엽저에서 찾아봐도 딱히 보이지는 않던데 줄기랑 착각을 했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정말 몇 개 들어있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향은 모든 팟에서 나긴 했으니 그것도 신기하다. 오렌지필이 시나몬보다 더 잘게 잘려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마도 오렌지필을 더 강하게 우려내야 해서 그런 것 같다.

오랫만에 깔끔

6g, 300ml, 100도의 물에서 2분 10초 우려내었다. 젖은 나무향이 차분하게 깔린다. 시나몬 향이 블랜딩 되어 부드럽게 코를 스치며 입안으로 들어가고 의외로 다즐링의 차 맛이 가장 먼저 느껴지면서 오렌지의 영향인지 산미가 스윽 스쳐간다. 다즐링의 맛과 풍미에 상큼한 오렌지가 잠깐씩 느껴져서인지 포트넘의 포트메이슨도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맛이다. 정향과 시나몬의 알싸함도 충분히 물에 녹아있는 튀지 않는 향으로 느껴진다. 가향이 아닌 재료 그대로를 우려내어 그런지 최근 마셨던 차들에 비해 굉장히 수용성으로 느껴졌다. 마치 첼로의 선율처럼 느껴지는 정향과 시나몬에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같은 다즐링과 오렌지향이 현악 3중주 정도 되는 느낌으로 아주 어쿠스틱 하게 느껴지는 맛과 향이다. 가향차가 각종 엠프와 이펙터로 무장한 화려한 사운드라면 비가향 블랜딩은 마이크 하나 없는 차분한 실내악의 느낌이어서 오히려 그걸 느끼고 전달해 주는 혀는 훨씬 더 열일을 해야 한다. 최근 한 달여 강한 가향에 길들여져 있던 혀가 한참 예민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은근한 수렴성이 혀를 굳게 한다.

그래도 시나몬롤과 잘 어울렸다

홈페이지 소개에선 밀크티 추천 마크가 붙어있다. 어쩐지 차분하게 영국식으로 우유를 부어서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12g, 300ml, 100도의 물에서 3분살짝 넘겨서 우려내고 따뜻한 우유를 조금 부어주었다. 다즐링이라고 너무 점잖게 대해준 걸까. 살짝만 넣어도 우유의 향이 차를 벌써 가리기 시작한다. 한 모금 마셔보자 확실히 정향과 오렌지향이 우유 속에서 돋아나기 시작한다. 다즐링의 맛과 풍미가 우유에 좀 가려지는 느낌인데 아무래도 다른 부재료들의 향도 있다 보니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수렴성만 남기고 차는 어디론가 가버린 기분. 로얄밀크티로 다시 마셔봐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스트레이트에선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쩐지 밀크티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하는 다즐링이다. 초여름에 마셨던 찰스티와 비교해 봐도 너무 약한 다즐링. 밀크티 추천이 왜 붙었는지 좀 의문이다.

정향은 정말 조금 들었다

밀크티 시도하느라 많이 써버리긴 했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차분히 한 해를 돌아보면서 마시기에 적당한 차였다. 연말 시즌티의 분위기도 충분히 내주면서 다즐링의 풍미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기에 오렌지 포맨더와 함께 천천히 한 해를 회고해 보았다. 8월 1일에 브런치에 첫 글을 올렸고 이제 올해의 마지막 글을 올리게 되겠다. 총 53개의 시음기.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에 써두었던 시음기들을 고려하면 7개월가량 소요가 되었다. 올해 들어 작성한 시음기가 그 이전 20년간 작성한 시음기보다도 많다. 그때 이 차가 이랬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작성하는 시음기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잘 공유가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중간중간 브런치라는 공간이 적당한 공간일까 생각도 들었지만 네이버나 인스타그램에 맞는 그런 힙한 건 잘 못하겠더라. 그냥 이렇게 주절주절 적기에는 역시 브런치가 맞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무슨 작가등록이니 이런 건 나와는 거리가 좀 먼 이야기 같고. 화려하게 크리스마스까지 잘 마무리했으니 이제 정리하고 내년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의 첫 차도 이미 준비해 뒀다. 마지막 오렌지 포맨더를 마시면서 이번 시음기도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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