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58. 히라키
루피시아의 새해 대표 블랜딩인 히라키는 새해 운을 불러준다는 매화 부적을 모티브로 한 블랜딩이다. 겨울철 대표 꽃인 매화를 쌀 튀밥으로 표현한 재미있는 차인데 이 또한 매년 한정 일러와 함께 나오는 걸 구경만 해보다가 기회를 노려 구입했다. 오랫만에 보부상님께서 활약을 해주셨는데 일본 다녀오시는 길에 신년 특집 일러 세 개와 청룡의 해 한정도 둘 사다 주셨다. 그게 벌써 한 달이 되어가는데 새해가 될 때까지 기다렸던 신년 특집 바로 시작. 히라키는 11월~2월 한정이라지만 실제로는 12월이 되어야 나오는 것 같다. 구입해야 하는 시기가 애매하고 짧아서 보통은 마시질 못했다가 이번엔 신경을 곤두세운 덕에 성공. 50g 한정 디자인 캔입은 1080엔, 봉입은 700엔으로 상미기한은 1년이다.
대나무도, 매화도 모두 겨울의 이미지인데 홈페이지 설명으론 '소문만복래', 웃으면 복이 온다는 뜻으로 대나무 자루를 쓴 귀여운 강아지가 웃고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우메 야 모모 노 아마이 카오리 가 하나히라쿠 요 니 히로가루 코차. 카이운 노 바이카 오 이메지 시따 아라레 또 이리고메 오 토핑그.
매화나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꽃피듯 퍼져나가는 홍차. 운을 불러오는 매화를 이미지 한 튀밥과 볶은 쌀을 토핑.
히라키는 열 개자 한자가 들어가는 '열다'라는 뜻으로 아마 매화가 개화하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지은 이름 같다. 새해를 열고 운세도 열고 복도 열고 다 여는 느낌으로 그냥 본격 새 해 복 많이 받으시란 이름이다. 일본은 참 이런 의미도 잘 만들어내고 상술에도 잘 붙이고 그러네 싶다. 또 그런 점이 사는 재미이기도 한 거니까 그게 나쁘다는 느낌은 아니고.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매번 구매하고 있잖아요.
봉지를 개봉하면 ㅇㅇ매실 음료수의 향이 확 올라온다. 그리고 스치듯 구수한 향도 함께 지나간다. 건엽은 의외로 잎이 자잘해서 토핑을 좀 건져서 사진을 찍는다고 찻잎을 뒤지는 손이 더 부서질까 조심하게 될 정도였다. 조금은 아쉬운 찻잎인데 블랜딩엔 이게 더 맞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히라키의 백미는 바로 하얀 쌀튀밥 토핑인데 볶은 쌀이 팝콘처럼 터져서 마치 하얀 매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 옆에 있는 빨간 건 매실을 이미지 했다고 하는데 빨간 우메보시를 생각했나 보다. 나한텐 그냥 붉은 동백으로 보인다. 겨울철의 두 꽃인 매화와 동백. 물론 향은 그냥 초록매실이다.
미리 작성해 놓고 첫날 올리고 싶어서 주말에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눈이 왔다. 이렇게 되면 눈 속에 핀 매화, 설중매인데. 6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렸다. 매실향이 희미하게 전달된다. 창문을 열어놔서일까, 그저 매실음료향이라고 생각되었던 향이 은은하게 한 김 식어가면서 새침한 일본식 매실절임의 향과 함께 살구향, 복숭아향으로 여러 층이 분리되며 느껴진다.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해 보면 그 여러 층의 향 뒤로 차분하게 홍차의 맛이 진행되면서 적지 않은 수렴성이 마무리를 꽉 닫아준다. 주된 가향은 매실에 가까운 살구로 일반적인 애프리콧과는 좀 다르다. 겨울철 사쿠람보를 꽤나 좋아하는데 눈코입이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매실에서 살구로 살며시 이동하는 움직임도 좋았고 개봉 첫날 이후로는 느끼지 못할 것 같은 복숭아 힌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차는 아주 맛이 순하다. 은은하게 순한 맛에 방심하고 있었는데 마무리로 조여 오는 수렴성이 사람 깜짝 놀라게 만들어서 개운으로 운이 트이는 게 아니라 나른하던 눈이 개안하는 효과가 있다. 살짝 밍밍한 실론의 기운도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차 맛을 희석시켜 둔 건지 모르겠다. 같이 들어간 볶은 쌀등이 숭늉맛을 내는 건가. 미스테리. 호불호가 있겠으나 나에게는 좋았다. 뒷맛을 꽉 잡아주는 느낌이어서 역시 홍차는 수렴성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
엽저를 다시 보니 의외로 줄기 부분이 많다. 분쇄도도 꽤 잘은 편이 맞다. 튀밥인 아라레가 물에 뿔어나면 녹말등의 성분 때문에 살짝 끈적해서 나중에 세척이 좀 불편한 부분이 있으니 그것도 참고. 엽저들이 아라레에 엉겨 붙어있다. 끈적한 아라레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진다. 늘 그렇지만 작년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로 인해 잔뜩 날이 서있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들도 많이 보였고 나 자신을 어쩌지 못해 내던져 두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어떻게든 제자리를 향해 돌아가는 많은 일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했다. 지나온 세월이 좀 지저분하게 묻더라도 끈덕지게 살아내야겠단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끈덕지게, 끈적하게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오늘처럼 차가운 눈 속에서 하얗게 피어나는 날이 있겠지. 모두들, 새 해 복 많이 받자. 하얗게 피어날 그날까지.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