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68. 유메
루피시아의 신년 삼총사 중 하나인 유메. 한자로는 꿈 몽 자를 써서 꿈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일본도 꿈을 이룬다는 동일한 말을 사용하는지 그런 어감으로 소원 성취나 뭔가 기원할만한 시즌에 어김없이 내세우는 루피시아의 대표 블랜딩이다. 부드러운 장미향으로 기억하고 있는 워낙 유명한 상시 판매 라인 제품이다. 같은 시기에 포트넘 로즈포총을 겁도 없이 250g이나 질렀다가 아내의 취향에 너무 맞지 않아 혼자 꾸역꾸역 다 마시고 있던 차에 비슷한 로즈라 싫을 법도 했는데 맛있게 잘도 마셨던 기억이 난다. 로즈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이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라 꿈을 되찾기 위해 주문. 사실은 새해라서 시음기 쓰려고 주문. 50g 한정 일러 캔입으로 1130엔, 봉입으로 750엔. 상미기한은 2년이다.
귀여운 고양이가 꽃들 사이에서 냥냥하고 있는 일러. 마네키네코인데 복을 부르는 고양이로 일식집 카운터에 있는 그거 맞다. 새해니까 복 들어오라는 일러스트겠지.
하나야카 나 바라 노 하나비라 가 이로도루 코우후쿠 니 츠츠마레루 코차. 바니라 야 후루우츠 노 아마미 카오리 와 미루쿠 티 니 모.
화려한 장미 꽃잎이 물들인 행복으로 감싸인 홍차. 바닐라와 과일의 달콤한 향기는 밀크티에도 어울립니다.
기본적으로는 딸기가향으로 장미꽃이 블랜딩 되어있다. 장미와 바닐라와 과일향의 조합인데 홈페이지를 보니 딸기 가향이 가장 베이스라고 한다. 그랬나? 유메가 딸기가향이었나? 물음표만 백만 개가 되었다. 전혀 기억에 없는데 밀크티 추천 라벨도 붙어있다.
개봉해 보면 달콤한 계열의 풍선껌향이 치고 올라온다. 조금은 흔한 루피시아의 가향차 몇 번 정도 되겠다. 문득 드는 생각이 원래 이런 향이었나 싶었던 게 좀 문제. 건엽을 덜어내고 보니 찻잎도 좀 옛날이랑 다른 것 같다. 전엔 좀 더 길쭉하게 말려있었던 거 같은데 좀 더 자잘해졌고 말리화?? 히스플라워??? 얘들이 왜 들어있지? 화사하고 예쁘긴 한데.. 한참을 감상하다가 혹시 몰라서 사진첩을 뒤져보았다. 뭔가 많이 변했다. 찾아보니 확실히 변하긴 한 게.. 상품번호 자체가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바닐라에 과일, 장미 조합이라는 큰 틀은 유지하면서 아무래도 인기가 좋은 밀크티용 딸기가향으로 틀었나 보다. 차도 중국 홍차에서 인도엽으로 바뀐 모양. 다시 보니 씨티씨 같은 동글동글한 애들도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던 유메와는 아주 다른 새로운 유메인 거다. 오호. 알고 있던 친구는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앞에 계신 분은 쌍둥이 동생이시라는 거죠? 이 무슨 오딱후 같은 설정인지. 아무튼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란 걸 확인하며 안심하고 리뉴얼된 블랜딩을 마셔본다.
6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렸다. 어째 딸기향은 아주 희미하고 바닐라와 딱 뒤범벅이 되어서 향료 없이 만든 딸기크림처럼 크리미 한 무언가의 향이다. 한 모금 마셔보면 크리미 하고 부드러운 안개 같은 향을 깔고 코코넛 우린 물이 느껴지다가 갑자기 산미 있는 열대과일류의 무언가가 되었다가 강한 수렴성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게 뭐죠? 제가 알던 유메를 돌려주세요. 식어서 맛이 변한 건가. 다시 한 팟을 만들어온다. 분명 딸기 가향이라고 했는데 딸기는 어디 갔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딸기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뉘앙스가 강하게 있긴 한데 뭔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맛이다. 코코넛 우린 것 같은 향은 아무래도 바닐라의 그것이었나 본데 자세히 맛을 보니 서양식 바닐라가향의 맛 어디쯤이 느껴지기도 한다. 산미 있는 열대과일 같은 향은 한편으로는 플라워리한 가향의 그림자도 엿보인다. 결론적으론 무슨 가향인지 딱 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렇다고 새롭고 맛있는 그 무엇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가향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꽤나 평평한 가향 스펙트럼에 강한 수렴성은 루피시아라고 믿어지지 않는 블랜딩이다. 뭐, 루피시아에도 이런 거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그게 왜 하필 유메.마크2인 거죠? 새해부터 신선한 충격이라 마시고 또 마셔보는데 적응이 잘 안 된다.
생각해 보니 밀크티로 마셔본 적은 없는 유메. 씨티씨스러운 차가 포함된 만큼 좀 더 밀크티에 무게를 둔 것이겠지. 12g, 300ml, 100도의 물에서 3분 우려서 따끈하게 해 둔 우유를 부어주었다. 5:2 정도 색이 조금 연하다 싶은 정도로 넣었다. 평소보다 우유를 더 많이 타준 건 다 사연이 있다. 원래 처음 했던 건 똑같이 우린 차에 밀크폼 100g 조금 안되게 올려주는 탕비실 레시피. 어.. 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향이 너무 짙은데 특히 루피시아의 그 풍선껌 같은 휘발성 향과 플라워리한 향들이 엄청나게 상승작용을 내서 코가 시큰거리는 밀크티가 되었다. 플라워리한 밀크티가 워낙 취향에 안 맞아서 이 부분은 취향을 좀 고려해야겠지만 이건 너무 밝은 향수 같은 밀크티가 되어서 기겁을 했다. 그래서 수정을 해준 게 우유를 충분히 부어주는 방식. 옅은 딸기맛 바닐라향이 달달하게 느껴지면서 너무 화려한 플라워는 우유로 단단히 눌러두는 느낌이다. 근데 이거 이렇게까지 밀크티로 마실 이유가 있나. 아마도 프루티 한 가향과 꽃향들이 밀크티와는 좀 충돌하는 게 확실하다. 뭐 어디까지나 취향일 수 있는 영역이긴 하다.
내가 알던 유메는 이제 만나기 어려워졌나 보다. 믿기지가 않아서 샘플로 왔던 유메 두 봉지도 다 까서 마셔보고야 시음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인기가 있는 걸까? 직구했던 두 번 모두 샘플로 유메를 보내주었다. 무려 5g 잎차 파우치. 아무래도 루피시아의 높으신 분들의 취향에는 잘 맞는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상품번호가 다시 바뀌기 전까지는 유메와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샘플로 보내주려나. 새해부터 루피시아와 나의 꿈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시작하게 되어서 이거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인가 보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