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59. 프레지에
20대가 막 되어서 알게 된 단어 중 듣자마자 뭔가 근질근질 몽글몽글 해졌던 단어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가 손에 꼽히는 것 같다. 마치 10대의 마지막을 붙들어 매는 기분이 드는 마법의 단어랄까. 막상 맛있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익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아서 더욱 아련해지는 느낌이다.
루피시아의 먹자 축제인 그랑마르쉐에서 파일럿으로 발매되었다가 레귤러에 편입된 프레지에는 원래 그랑마르쉐 시절 이름이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였다. 비슷한 케익이긴 한데 약간은 질감이 바뀌는 기분이다. 프랑스식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랄까. 아무튼 지난번 마셨던 오페라와 함께 정규 편성된 또. 딸기. 홍차.
원래는 캐롤과 비교시음하면서 같이 마실 요량으로 주문하였으나 12월에 마셔야 할 차 스케쥴이 워낙 바빴어서 결국 여기까지 밀리고야 말았다. 조만간 토치오토메를 마시게 될 것 같은 시즌까지 밀렸으니 오히려 잘 된 건가. 50g 봉입으로 680엔. 상미기한은 의외로 짧은 1년이다.
깔끔하게 프레지에. 우리는 시간이 살짝 짧은 편인걸 제외하곤 평범한 루피시아의 홍차 라벨이다.
아마주파이 이치고 또 노코나 쿠리무 가 토케아우, 하나야카나 후란수풍 쇼토케키 오 이메지 시타 코차.
새콤달콤한 딸기와 진한 크림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프랑스식 숏케이크를 이미지 한 홍차.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밀크티가 히트 쳐서 레귤러까지 올라온 만큼 공홈에선 밀크티 라벨을 확인할 수 있다. 밀크티 지향의 2~2.5분이니 아마 아쌈 씨티씨 계열이겠지. 오페라도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스트레이트에서도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었던 오페라를 다시 생각해 보면 새콤달콤한 한국 일본의 생딸기가 얼마나 살아있을지, 그리고 크림향의 부드러움은 그 디테일이 어떨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봉지를 개봉하면 풍선껌스런 루피시아의 휘발성 딸기가향이 물씬 올라오면서 그 뒤로 희미하게 바닐라 같은 달콤함이 함께 섞여 나온다. 조금 더 자세히 코를 대보면 휘발성 가향과 달달한 향 뒤로 찻잎에서 풀내가 솔솔 난다. 인공딸기에 풀내 조합이면 너무나도 봄의 이미지여서 잠시 설렌다. 건엽을 덜어내 보니 흰색과 빨간색의 아라레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가 연상되는 귀여운 아라레. 아라레가 들어있으니 우려낸 뒤 우림팟을 빨리 씻어내는 게 좋겠다. 안 그러면 점점 끈적하게 변해서 들러붙어버리니 설거지가 조금 귀찮아진다. 잎의 대부분은 아쌈 씨티씨로 밀크티를 겨냥한 블랜딩 의도가 명확해 보인다.
6g, 300ml, 100도의 물에서 2분간 우려낸다. 스트레이트에서도 이미 밀크티의 향이 나는 것은 무엇. 스트로베리 쇼트케익을 모티브로 했으니까 당연히 크리미 한 걸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크림 쪽의 크리미가 아니라 약간은 버터크림 느낌으로 크리미 하다. 아무래도 프레지에로 이름을 바꾸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루피시아가 보여주는 보통의 가벼운 달콤함이 아니라 한 것 무겁게 달달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쇼트케이크보단 프레지에가 맞는 느낌이란 생각이 든다. 파티셰가 아니어서 정확히 표현을 못 해 드리는 게 아쉬울 따름. 향의 진하기나 크리미함이 캐롤을 한참 웃도는데 딱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선까지 노골적이다. 우려낸 차의 향만 맡아도 뭔가가 충족되는 기분. 유래 없이 오랜 시간 향만 맡다가 드디어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에?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대부분의 향이 사라진다. 씨티씨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그 수렴성을 펼치면서 혀를 휘감고 차의 풍미가 울컥 지나간다. 그 와중에 차의 가향은 거의 느껴지지가 않고 약간의 산미정도가 느껴질 뿐이다. 물질감도 굉장히 적은데 가향차에서 물질감 좀 적게 느껴지면 어때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이번엔 좀 향도 적고 풍미도 저렴한 씨티씨의 딱 그것이라서 어딘가 많이 애매하다.
밀크티에서는 좀 기대감이 있다. 오페라도 그렇고 아무래도 대놓고 밀크티를 겨냥한 블랜딩이라는 느낌이 있으니까. 6g, 15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려내어 우유와 함께 마셔보았다. 와, 이 차, 정말 정직하게 밀크티 전용이다. 스트레이트에서 생겼던 모든 불만이 사라졌다. 우유와 함께하니 모든 가향이 고스란히 밀크티 안에 녹아있고 부족했던 물질감도 우유가 담당해 주고 딱 알맞게 되었다. 물론 약간의 새콤한 풍미가 거슬리긴 하지만 이것은 설탕을 넣지 않는 내 취향의 탓이 큰 것 같다. 티 라떼를 만들어서 마셔보면 그 장점이 더 살아나는데, 따뜻한 폼밀크 아래로 차를 흘려 넣어주면 스트레이트를 잔에 따라 두었을 때 공간을 가득 메우던 향이 그대로 밀크티 안에 가둬지는 느낌이다. 물론 잔 밖으로 향은 잘 나지 않게 된다. 밀크폼에 녹아든 프레지에의 향이 폭신폭신하게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황홀감이 있다.
오페라를 워낙 맛있게 마셔서 기대를 크게 했던 프레지에인데 오페라에 비해서는 조금 아쉽게 되었다. 밀크티로 비교해도 역시 나는 캐롤이 조금 더 취향인 듯. 웃기는 건 마시면서 계속 프레지에 한 조각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 이름도 비슷한 베이커리에 프레베리라는 케익이 있는데 그거 한 조각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런 점에서는 꽤나 성공적이었달까. 늦겨울의 상큼한 딸기케익 한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프레지에었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