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쥬 프레르 T719. 스모키 얼그레이
연초에 긴자 마리아쥬에서 구매한 스모키 얼그레이. 전부터 좋아하던 블랜딩이라 망설임 없이 골라서 과감하게 100g을 담아왔다. 가격은 2300엔. 이날 오랜만에 비싼 차를 담아 오느라 이렇게 돈을 써도 되나 싶은 날이었는데 올해 두어 번의 차 플랙스를 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은 가격이 되어버렸다.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겠다. 마리아쥬의 대표 얼그레이라면 프렌치 블루 얼그레이가 훨씬 유명하지만 이날은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쪽을 고르다 보니 스모키 얼그레이로 결정했다.
스모키 얼그레이는 그야말로 훈연향을 입힌 얼그레이인데 이거 한때, 그러니까 00년대엔 한국에서도 꽤나 마셨던 거 같은데 요즘은 보기 힘든 것 같기도 하다. 차 인구가 늘었다고 하는데 가끔 이런 부분에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갈수록 접할 수 있는 차의 종류는 줄어들고 있어서 코어 소비층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도 든다. 정산소종과 랍상소우총이 같은 어원인걸 알려준 이후로 아내는 스모키향만 맡으면 뢍솽퐁숑이라고 하는데 스모키 얼그레이도 뢍솽퐁숑 계열의 차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정확히는 얼그레이가 조금 더 우세한데 임팩트로 따지면 스모키와 얼그레이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스모키 쪽이 더 강하다.
소분봉투를 열어보니 랍상소우총에 가까운 그야말로 정석의 스모키 한 향이 올라온다. 그 뒤에 얼그레이의 알싸함이 끄트머리를 쳐올려준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연기 자욱한 숲 속에서 얼그레이의 수색처럼 붉은 머리의 귀공자 장군님이 칼을 차고 걸어 나올 것 같은 무게감과 카리스마. 스모키 얼그레이의 향은 언제나 시벨리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깔끔하고 깊은 가향에 다시 한번 감탄.
300ml, 6g, 100도의 물로 2.5분 우려냈다. 따라낼 때부터 훈연향이 잔밖으로 넘쳐흐른다. 천천히 마시기 시작해 보면 비강 쪽으로 훈연향이 차오르면서 텀을 두고 얼그레이의 쌉쌀한 시트러스가 구강 쪽으로 지나간다. 층분리가 일어나는듯한 어색함이 아니라 그만큼 레인지 넓게 꽉 차는 복합적인 향이다. 차에 대해 무지하던 10대 시절엔 얼그레이가 그레이니까 너무나도 회색의 이미지였고 티백을 5분6분 담가둔 탓에 정말 엉망인 맛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의 과추출 맛이 약간은 스모키 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야 그건 기분 나쁜 쓴맛이고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스모키지만 생각해 보면 재밌는 추억이다. 곁들이는 티푸드는 딱히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게 워낙 인상이 강한 차에 들다 보니 가벼운 과자부터 샌드위치류까지 커버가 가능하다. 내 취향은 딸기잼 들어간 과자와 함께하는 걸 선호하는 편.
스모키 얼그레이는 소나무처럼 단단한 안정감을 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차로 아침에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오후라면 점심 지난 이른 오후보단 퇴근이 얼마 안 남은 늦은 오후에 마시게 되는 차다. 데일리로 자주 마시다 보니 소비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서 진즉에 다 마시고 이제야 시음기를 적어본다. 그러고 보면 간단하게 메모만 해놓고 완성하지 않은 시음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물론 차는 다 마신 상태. 반대로 말하면 차만 마시고 글은 안 썼습니다. 간략하게 적어 올리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다들 마무리해서 올려보겠습니다. 스모키 얼그레이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