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G T6063. TEA PARTY TEA
일본 나고야에서 우연히 만난 TWG 매장에 들어가 쇼핑했던 차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TWG 매장에서 쇼핑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는데 특히 “가향이 좋아 비가향이 좋아?” 라던지 “과일 쪽? 꽃향기 쪽?” 같은 질문들이 ENFP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다 좋다” 외엔 달리 대답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쇼핑하는 주체가 좋다 싫다를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뭔가 진행이 안되니까 한편으로는 있는 대로 까탈을 부리기도 했다. 다 좋지만 다 그냥 그런 느낌. 그러다 보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게 고르고 고른 차들 중 하나인 티 파티. 티 파티라고 하면 당연히 보스턴 티 파티 이쪽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시향을 해보니 바닷물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아 앨리스 원더랜드 쪽이 맞겠구나 싶었다. (농담이고 이 제품은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 그림의 틴케이스가 이미 유명하다) 내가 지향하는 티에 대한 별별 생각과 함께 시향 했을 때 뭔가 아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처음 접하는 건지 아리송한 느낌이 들어 살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부터 궁금하기도 했고 시향도 다시 생각하면 뻔한 듯 새로운 향이라는 뜻도 되는 것이기에 50g 오케이를 했고 1200엔 소분판매를 사 오게 되었다.
티 파티라고 하면 아무래도 케이크라던지 샌드위치라던지 각종 티푸드를 잔뜩 차려놓고 끝없이 차를 마시는 파티를 생각하게 된다. 그에 맞는 화려한 찻자리들도 함께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 화려한 이미지의 블랜딩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평범하게 달달한 가향차였다. 공홈엔 캔디처럼 달콤한 차라고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고 케익이나 샌드위치에 잘 어울린다고 하니 전형적인 애프터눈티 되시겠다. 먹고먹고먹는것이 하이티의 미덕이지 암. 바닐라 가향의 차에 꽃잎이 아름답다는 후기가 대부분. 좀 더 자세히 보려면 역시 직접 뜯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봉투 오픈.
봉투를 열자 꽤나 클래식한 향이 난다. 약간 사과향이랄까. 정확히는 표현이 안되는데 그 향에서 노스텔지어가 느껴져서 구입할 때 하나 가져가자 맘먹은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옛날 가향차들에서 자주 났던 향인데 뭐더라. 건엽을 덜어내자 다양한 토핑들이 나온다. 파인애플로 보이는 과육, 메리골드, 오렌지필, 콘플라워까지. 카사바칩 내지는 코코넛칩으로 보이는 작은 조각들도 있었는데 오렌지필 부스러기처럼도 보여서 뭔진 모르겠다. 바닐라 가향이라고 그랬는데 달달한 과일향이 떠오른다. 새콤한 게 훨씬 먼저 다가오네.
6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렸다. 넘실대는 열대과일향. 분명 파인애플이 들어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망고인지 파파야인지 구아바 같은 향이 난다. 그냥도 아니고 넘치도록 난다. 건엽에서 열대과일의 인상을 강하게 받지는 않았던지라 살짝 놀라긴 했다. 한 모금 마셔보자 마치 과즙을 짜 넣은 듯 쥬시 하다. 약간의 산미가 있는 찻물이 메리골드와 콘플라워의 구수달달한 느낌으로 중재되면서 플라워리 한 느낌과 트로피컬 한 느낌이 딱 잘라서 어느 쪽이다 할 수 없게 밸런스가 맞아 들어간다. 모든 맛과 향이 은근하고 그러면서도 명확하여 절묘하게 절제된 느낌이다. 달달가향, 과일가향, 꽃가향이 다 들었는데 컨트롤이 가능하다니. 벌써 용량초과로 터져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 와중에 순딩한 척하고 있는 홍차 베이스는 순간순간 날카로운 수렴성이 느껴져서 방심하면 떫탕이 되기 십상이겠구나 싶다. 하이티, 애프터눈티에 맞춰진 블랜딩이기도 하고 자칫 밍밍하게 마셨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블랜딩이 되기 쉬운 느낌이라 평소보다 찻잎을 풍성히 넣어주고 시간을 살짝 줄이는 느낌으로 진하게 가는 것을 추천하는데 그러다가 꽤 떫은 차를 만들게 될 수 있으니 잘 조절해야겠다. 브루잉 난이도가 약간 있는 편. 급랭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밸런스가 그대로 유지되므로 급랭 아이스티도 완전 추천한다. 총평하자면 지금까지 마셔본 TWG 가향중에선 장원.
맨날 마시던 TWG 말고 그 외의 유명 가향차들을 마시다 보니 나름 블랜딩의 방향이 정확히 있구나 하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 바닥에선 후발기업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최근에 생긴지라 신생기업에 가까운데 고급 블랜딩, 특히 가향차에서 차별적인 제품을 개발하는 건 너무도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TWG가 한국에 상륙했을 무렵엔 지금 TWG의 가향차 라인업의 대부분을 ‘이미 마셔본 맛’으로 생각하게 했을 기존의 유명한 블랜딩들이 즐비했었다. 시간을 15년쯤 전으로 돌려도 서두에 언급한 ‘무슨 차를 마시지’ 하는 고민을 똑같이 했을 거란 이야기다. 하지만 집에 와서 찬찬히 맛을 뜯어보니 단순히 카피라고 말하기 어려운 절묘한 지점에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 놓은 것을 알겠다. 플라워리 하면서 트로피컬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동시에 플라워리 하지도 트로피컬 하지도 않기는 얼마나 더더더 어려운지. 불가능에 가까운 블랜딩이고 독창성을 확보한다는 명분만으론 감히 실행하기 어려운 개발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이는 맛인가? 하면 그렇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러한 사정을 상상해 보면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가향의 파티 같았던 TWG의 티 파티를 마셔보았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