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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Nov 09. 2020

현실과 이상의 괴리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나의 면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따로 연락을 주겠다는 부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학교를 나섰다. 집에서 학교는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학교를 나서면서 생각했다. '아,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집에 돌아와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후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 마음을 접었다. "아무래도 떨어졌나 봐."라고 허탈하게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내 마음을 잘 다독여주었고, 한껏 위로를 받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저희 초등학교 2학년 부담임 선생님으로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출근은 9월 1일부터이며 행정실에서 계약 관련 안내차 연락이 갈 거예요...'라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내게도 출근의 날들이 찾아온 것이다! 신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히죽히죽 웃었다. "여보, 나 합격했대!"


  면접에 합격한 날은 8월 24일이었다. 출근 날까지는 약 8일의 시간이 남았었다. 필리핀에서 돌아와 코로나 시기에 취업에 성공했다니, 이 기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의 첫 통화는 당연히 엄마였다. "엄마! 글쎄 내가 사립초 부담임이 되었어!" 동네방네 이 기쁨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것 봐, 이게 봐로 내 능력이지!' 하는 마음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내 능력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봐 주길 바랐다. 부모님, 시부모님, 사돈의 팔촌까지 널리 널리 알리고 나니 뿌듯한 마음이 가득 찼다. 여기저기 칭찬해주는 말들이 오갔다. 급기야 엄마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친구들에게까지 알렸다고 했다. 막내딸이 필리핀에서 돌아오자마자 취업을 했다며 알리셨고,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셨다고 했다. 그 모든 기쁜 소식의 마무리는 형님의 취업 축하 선물이었다. 갖가지 사무용품, 화장품, 작은 메모지, 향수까지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 필요한 모든 물건이 넘쳤다. 물건을 한데 모아 사진을 찍어두고 나니 드디어 취업인이 된 것만 같아 뿌듯했다.


  그렇게 약 8일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드디어 9월 1일이 다가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행정실에 먼저 들려 준비한 서류를 건네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사실 계약서를 작성할 때부터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계약 조항을 읽어내려 가는데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은 문장들이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되게 애매하네.'라고 생각하며 집중할 때, 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디 계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하셨죠?" 부장님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다급했다. 나는 서둘러 행정실에 있음을 알렸고, 서류 정리가 끝나면 바로 올라와줄 것을 요구하셨다.


  부장님이 이야기한 교실에 가보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돌봄 아이들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각기 패드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아이는 신발도 벗어놓은 채 게임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다른 아이는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 주변에 다른 아이들도 잔뜩 몰려 있었다.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 가방, 물병이 넘쳐났다. 2학년 담임 선생님 두 분이 오셔서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이끌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이 아이들이 돌봄인데요. 기기는 좀 만질 줄 아시나요? 이 아이들을 봐주시면 됩니다."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난리였다. "선생님! 충전이 안돼요!", "선생님! 이어폰에서 소리가 안 나요!", "선생님! 줌에 접속이 안돼요!", "선생님! 모기 물려서 간지러워요!", "선생님! 화장실 좀 가면 안돼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자리는 없었다. 형님께서 마련해주신 사무용품을 가지런히 놓을 내 책상 같은 건 없었다. 가지고 간 가방조차 놓을 자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생존의 본능이 싹을 텄다. 어떻게든 내 자리를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고 느꼈다. 아수라장을 비집고 들어가 마땅한 책상 하나를 잡았다. 제일 먼저 그곳을 재빠르게 정리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니. 이 감정과 문장을 이렇게 경험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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