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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Nov 06. 2020

어설픈 부캐의 시작

어쨋든 시작한거니까

  필리핀에서 귀국한 지 벌써 4-5개월이 되어간다. 갑자기 떠나게 된 필리핀에서 약 일 년 반 정도를 살았다. 영어공부도 하고 가족들과 맘껏 부대끼며 살았다. 철저하게 육아맘으로 살면서 경력도 단절되었고,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살았더랬다. 그러다 취업전선에 뛰어든 지 일주일 만에 취업이 되었다. 물론 4개월 단기 비정규직이지만 말이다.


  코로나 19 덕분에 필리핀에서 탈출하여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올해 초에 확산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과 한국을 넘어서 온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거주하고 있던 필리핀 바기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기오는 필리핀의 루존 섬 북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높지 않고, 더욱이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 습하고 쌀쌀하다. 우리 가족은 한 신학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학교 안에서조차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만큼 규칙이 엄격해져 갔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높아짐에 따라 필리핀은 강제적으로 이동을 제한하였다. 다행히 우리는 학교 안에 살고 있어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캠퍼스를 걸으며 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캠퍼스 산책도 한두 번이지, 학교 밖 외출은 가정 당 한 사람에게만 허용하였다. 나는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외출권은 남편에게 돌아가서 나와 아이들은 2월부터 5월까지 외출이 금지된 셈이었다.


  약 3개월 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몸과 마음이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2월과 3월은 살만했다. 선선한 날씨에 캠퍼스를 누비며 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4월이 시작되자 스멀스멀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비를 경험하면, '아, 내가 정말 동남아시아에 있구나!'하고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무리 농구장을 빙글빙글 돌더라도 쏟아지는 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지붕이 있는 농구장이었음에도 세찬 비바람을 온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비는 하늘에서 구멍이 뚫려 쏟아지듯 내렸다. 그 덕분에 강제 집콕이 이어졌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래블 패스를 받아야 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필리핀 생활을 철수하고 돌아가야 하니, 철수할 짐도 만만치 않았다. 그 모든 일을 꾸역꾸역 해내고 마침내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눈물 없이 적을 수 없는 다사다난했던 그 날의 일들은 언젠가 또 남길 기회가 생기겠지. 한국으로 돌아오니 잠잠했던 코로나 상황이 급격히 심각해졌다. 이태원 발 코로나 확산은 거리두기 단계를 격상시켰다. 우리 가족은 2주간의 자가격리를 마치고도 마치 필리핀에서처럼 집콕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두 달여를 보냈을까, 나는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강제적으로 외출이 금지된 상황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나갈 수 있는 우리나라에 있지 않은가!

  

  나 홀로 조용히 밤마다 '구인구직'란을 뒤졌다. 인터넷 검색창에 '서울시교육청 구인구직'이라고 검색하면 교육청에서 제공하는 비정규직 및 기간제 교사의 구인 정보를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나의 지역을 검색하고 마땅한 자리 두 곳을 찾아내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남편에게 내밀었다. "여보, 나 여기에 지원해봐도 될까?" 남편이 하지 말라고 하면 깨끗하게 마음을 접을 생각이었다. 사실 학교에 이력서를 작성하기 전에, 편의점 알바 자리가 들어왔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시급은 9000원. 그 어디보다 꿀이라는 생각에 덥석 하겠다고 했었는데, 남편은 너무 급하게 결정할 것 없다며 미뤘다. 그랬던 그가 흔쾌히 해보라고 찬성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 만에 작성하는 이력서인지 감개무량했다. 아이를 낳고 난 뒤, 단절되었던 나의 경력에 드디어 빛을 발하는 시기가 온 것인가 싶어 마음이 콩닥거렸다. 이력서와 준비할 서류를 마치고 면접을 보러 갔다. 내 앞에 있는 세 명의 담임 선생님은 이것저것 물으셨다. 거주지는 어디인지, 필리핀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자녀는 몇 명인지, 내가 일하는 동안 자녀는 누가 봐주시는지 등등 제법 상세한 것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모든 질문에 유연하고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다가, '국내 학교에서 일한 경력'을 묻는 질문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내게 국내 학교는 교생실습이 전부였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 사이로 가느다랗게 이야기했다. "네. 그런데 저, 필리핀에서 한글학교에 근무했었어요."라고. 국내 학교의 경력을 묻는 질문에 필리핀 한글학교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마는, 그것은 단절된 9년 세월의 작지만 반짝이는 빛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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