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시린 날

마음의 옷깃을 여밀고

by 은소리

춥지 않은데 혼자 떨릴 때가 있다. 그동안 참아왔던 추위가 한 번에 휘몰아쳐 오는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가슴이 시리고, 추워서 자꾸만 정신을 놓게 되는 그런 날이 있다.


사람에게 '관계'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뭐라 특정 지어 설명하기 어려운 명제다.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서 한 가지로 콕 집어 표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런 어려운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명확해지기도 한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분명 해지는 지점에 맞닥트려서 결국 선택하게 된다.


편하게 만나 밥 먹을 수 있는 사이, 공적인 이야기만 건넬 수 있는 사이, 가볍게 농담 정도는 건네도 되는 사이, 시시콜콜 전화해서 수다 떨 수 있는 사이, 슬프고 힘들 때면 생각이 나는 사이, 언제든 기댈 수 사람이 되고픈 사이, 무조건 내 편이었으면 하는 사이. 사람 사이에 따라붙은 수많은 수식어들이 그 관계를 정의 내린다. 다양한 정의 안에 비좁게 자리 잡은 너와 나의 사이가 그 기대치에서 멀어질 때, 유독 시린 날이 된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기대치를 갖고 있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 기대고 싶지는 않으나, 모든 일을 알리고는 싶고. 모든 일에 내 편이길 바라진 않으나, 막다른 골목에선 내 편이길 바라는 관계가 있다. 상황이나 시간, 환경에 쫓기다 보면 내 뜻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피하고 피해도 결국 그 자리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결국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실은 환경과 상황을 거슬러 다른 길로 달려갈 용기가 없어서이다. 갖은 말로 스스로를 설득하고 결국 용납시키는 역할을 자처한다. 나는 '안전제일 주의자'이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감정과 상황을 용납하며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으면 했다. 걱정 어린 시선을 넘어 '널 알고 있다'는 눈빛이 흘러나오길 바랐었다. 걱정이 돼서 하는 이야기들 속에 어쩐지 가슴이 시렸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아저씨가 여직원에게 말한다. "내가 널 알아."라고.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아저씨의 이 대사가, 걱정 어린 말들 사이에서 비집고 나와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결국 감당해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을 '인지'하게 된 채,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걱정하는 마음과 다가올 일들에 대한 염려, 그 가운데 힘들며 버텨야 할 시간들에 대한 당부까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참 시렸다. 다 아는 이야기 말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빼내었더라면 조금 덜 추웠을까. 어차피 마주하게 될 수많은 표현들 중 하나일 텐데, 하필 이렇게 마음이 삐그덕거리고 말았다. 어차피 모두가 내 편이 될 수 없는 세상인데, 하필 이렇게 서운함이 삐죽 올라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단호히 그 대화가 '나쁘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이를 먹으니 알게 되었다. 개인의 서사와 어투, 우선순위, 배경과 사상이 '사이의 다름'을 낳는다는 것을.


추운 바람은 매섭고 강렬해서 '살 떨리게 추운'법이지만, 결국 바람과 태양의 대결에서도 태양이 이겼으니까. 매서운 이 겨울바람이 지나고 나면 한결 숨쉬기 편한 그런 날도 올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따뜻함이 결국 이기게 될까 싶지만, 마음의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봄이 올 거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