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반드시 말이에요.
남편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그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 '아! 이 남자구나!' 하며 결혼을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무얼 보고 첫눈에 반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스물여덟에 그와 처음 만나 단 8개월 만에 결혼했다.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과 이토록 빨리 결혼할 수 있었는지 지금의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결혼을 결심했고,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연인에게 '결혼식'은 마치 '결승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침내 결혼!', '드디어 결혼!'과 같이 '결혼' 앞에 함께하는 수식어들은 하나같이 '마지막'을 의미하니 말이다. 그래서 최면에 걸린 것처럼,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으로 인생이 마무리되는 것 같이 느낀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말을 남겼다. 그는 인생의 길이 단순히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수많은 디즈니의 공주들은 왕자를 만나 결국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이야기의 결말을 맞이한다. 그러니 동화를 읽고 자란 꿈 많은 소녀들은 왕자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인생의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닐까.
결혼과 가정 뒤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 그 행간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반짝이는 신혼 뒤에 캄캄한 육아의 시간이 있다.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의 순간 뒤에 서로의 날을 세우며 존재를 논하는 어리석은 순간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도 결국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하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의 인생길 위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수많은 사건과 순간들을 마주치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희로애락을 '정리'하면서, 자신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몰랐던 모습에 놀라고, 합리화하고, 변명하고, 애써 태연하며, 결국 스스로를 '대변'하려고 애쓰는 것 말이다. 그 모든 순간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도록, '나'를 이해시키고,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얼마나 많은 순간 '나'의 기분과 상황,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 고르기를 힘쓰고 있는가. 한마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는가. '기분'이나 '감정'과 같이 애매모호한 것들이 '노력'의 과정을 통해 '단어'나 '말'로 정리되는 과정 속에 인생이 있는 것만 같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파하고, 속상해하고, 기뻐하는 순간의 기분과 감정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글을 쓰는 작가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래알 속에 자신의 진주를 찾는다.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한 소절의 노랫말이라도, 한 문장이라도 인생길 위의 너와 나를 대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마음껏 읽고, 쓰고, 듣고, 노래하며 길 위에 머물러야겠다. 너의 노래가 나를 말해줄지 모르고, 나의 이야기를 너를 설명해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노래하는 너와 끄적이는 내가 만나 서로를 위로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