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를 지켜야 해요, 눈물 차례거든요.
마음이 보낼 수 있는 제일 정확한 신호가 있다면, 그건 '눈물'이 아닐까?
눈물이 많은 사람은 감정이 풍부해 보인다. 잘 울고, 잘 웃고, 잘 표현하며 사는 사람 같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 과정을 어려워하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의 아픔이나 즐거움이 가감 없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괜찮은 사람, 참 건강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 놓고 꺼이꺼이 울었던 적이 별로 없다. 결혼한 뒤에 남편을 만나,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남편은 감동받아서, 슬퍼서, 부끄러워서, 미안해서 잘 운다. 미안한 마음에 울기도 하고,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울기도 한다. 감동받는 일엔 여지없이 눈물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에 코 끝이 찡해진다고도 했다. 남편은 여러모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잘 우는 법이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남편을 가만히 끌어안고 토닥이는 것이 내 역할이다. 무엇이든 뚝딱 해낼 것만 같은, 어딜 가나 기죽지 않고 당당할 것만 같은, 그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안아준다. 눈물은 큰 소리와 함께 흐르기도 하고, 속삭이듯 조용한 흐느낌과 함께 흐르기도 한다. 그는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제때 받아서 마음에 두지 않는다. 폭포수처럼 쏟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제일 밑바닥에 있는 감정을 끄집어 올리듯이 흐느끼기도 한다.
첫째 아이가 만 세 살쯤 되었을까? 하루는 아이가 펑펑 울기만 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 보아도, 다른 것들로 흥미를 바꿔보아도,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하염없이 우는 아이를 가만히 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나도 모르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이는 한동안 눈물을 더 쏟아내었다. 아마 아이는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내겐 그 날이 아주 또렷하다.
아이들이 짜증 내며 울 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며 울 때, 이유 없이 그냥 울 때마다 한 번쯤은 그냥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훈육을 차치하고, 마음을 오롯이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을 가졌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이다. 살면서 한 사람쯤 온전히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가진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싶어서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앞으로 걸어갈수록 알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자신의 선택이 맞는지 고민하면서, 때로는 넘어져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을 텐데. 그 모든 순간순간 지친 마음이 깜박이며 신호를 보내는 것을 무시하지 않으며 살아갔으면 싶다.
물론 내게도 마음의 그릇이 여유롭지 않을 때가 있다. 내 감정이 흘러서 넘치고, 마음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해 꾸역꾸역 쌓여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때가 있다. 예전에는 흘러넘치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혼자 울곤 했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잡아 올리고 혼자 꺽꺽거리며 울었더랬다. 그런데 그렇게 울고 난 울음은 늘 개운치 않았다.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와 감정의 찌꺼기를 닦아내지 못했다. 분명히 마음에서부터 출발했는데, 외로움과 자기 연민에 휩쓸려 다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흐르더라도, 혼자 우는 울음은 이내 돌아가서 더 깊이 콕 박혀버린다. 이를 알면서도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제때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괜찮다고 치부해버렸다. 무엇이든 돌보지 않으면, 애써 살피지 않으면 한 번에 닦일 수 있는 것들도 켜켜이 쌓이고 만다. 켜켜이 쌓인 찌꺼기들 속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니, 더 이상 할 짓이 아니다 싶었다. 잘 우는 것도 잘 웃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든 눈물을 완벽하게 다 받아낼 자신이 없다. 나도 내 울음을 어찌할 줄 몰라 끙끙거릴 때가 많으니 말이다. 신호를 무시해서 내야 할 인생의 벌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신호를 과속해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울음을 감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라나는 너와 내가 혼자 울지 않기를, 마음의 신호를 모른척하지 않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