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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Apr 18. 2021

당신에게서 꽃내음이 나네요

사랑하는 나의 아빠

  어렸을 때 나의 아빠는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어릴 때 아빠의 친구를 만나 인사드린 기억이 별로 없다. 퇴근하자마자 작업복의 먼지를 털며 집으로 들어오셨더랬다.


  내가 태어나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신용 종합 설비' 가게를 운영하셨다. 가게 뒤편의 조그맣게 꾸며놓은 방 한 칸이 우리 집이었다. 좁디좁은 방이었다. 아주 좁은 방 한 칸 뒤편에 작은 주방과 화장실이 함께 있었다. 주방 장판 위에 누워 있노라면, 아빠는 대야에 물을 담아 머리를 감겨 주셨다. 가만히 누워 아빠가 감겨주는 손길에 눈을 감고 있으면 지붕 위로 '타닥타닥 타닥' 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면, 후다닥 달려가는 쥐꼬리가 보였다. 맞은편, 길 건너에 비슷한 형편의 아빠 친구분이 운영하시던 다른 가게가 있었다. 그 집 딸내미와 나는 동갑이었고, 우리는 쉽게 단짝이 되었다.


  가겟집에서 단짝과 유치원에 잘 다니다가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 부모님은 한 번도 이사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유치원에서 외할머니 댁으로 하원 하던 어느 날, 친척 언니는 우리의 이사를 부러워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우쭐대는 마음이 생겼더랬다. "너희 집은 이제 아파트로 이사 간다며? 좋겠다!"라고 말하는 언니 앞에서 집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었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계셨던 할머니께서 쥐어박듯이 말씀하셨다. "좋기는 뭐가 좋아! 다 망해서 쫓겨가는 것이구만!" 할머니의 말씀에 언니와 나는 금세 조용해졌지만, 내 마음속 이야기는 되려 커졌다. '흥! 할머니는 알지도 못하면서! 망했는데 어떻게 아파트로 이사를 가? 할머니 바보.'


  할머니의 말씀이 맞았던 것인지, 그 이후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를 다녔다. 같은 주공아파트의 다른 단지로, 그다음엔 아예 다른 동네의 빌라로, 또 다른 주공아파트의 다른 단지로 이사를 다녔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어 지낼 만하면 이사를 다니는 꼴이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이사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언니와 나도 굳이 부모님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사를 다닐수록, 아빠의 작업복에 먼지는 그득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의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그렇게 먼지가 가득한 날들이 지속되던 어느 날, 드디어 엄마와 아빠가 우리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우리, 우리 집으로 이사 가자!"


  '우리 집으로 이사 간다'는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어린 나였어도, 부모님의 미소만으로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엄마는 연신 방긋방긋 웃으시며 "이제 이사는 그만 다녀도 되는 거야.", "우리가 집을 사서 가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어느 때보다 이사 가는 부모님은 힘이 넘치셨다. 그날 이후로 아빠의 퇴근길에는 먼지 대신 통닭이 들려있었다. 아빠는 친구들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시는 법이 없었다. 시장에 들러 맛있는 통닭을 사들고 서둘러 퇴근하셨다. 엄마가 좋아하는 콜라를 함께 사 오시거나, 언니와 내가 좋아하는 과자가 함께 들려 있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 간 "우리 집"은 늘 우리와 함께였다. 넓고 커다란 집은 아니었지만,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소소하게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우리의 첫 집은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의 어깨는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바지춤에서 짤랑거리던 동전 소리도 더 이상 구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늘 모았던 동전 꾸러미도 애처롭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이라는 건 참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또 한 번의 이사를 결정하셨다. 언니와 나는 극구 반대했지만, '더 나은 환경'을 원하시는 부모님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더 크고 넓은 집으로, 좋은 환경으로 가는 이사였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의 첫 집을 저버리는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 내 방을 갖게 되었고, 거실에 커다란 텔레비전과 소파를 놓았다. 그렇게 한 두 해가 지났을까, 우리 집은 옥탑방으로 마지막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언니와 내가 시집을 갈 때까지 빗소리가 들리는 옥탑방에 살았다. 아빠의 진두지휘 아래 우리 가족은 옥탑방 공사를 직접 했다. 컨테이너를 잘랐고, 집이 너무 춥지 않도록 단열재를 붙였다. 설계를 하고 공사를 하던 아빠의 작업복에는 여전히 먼지가 그득했다. 며칠씩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기도 하셨다. 아빠는 언니와 나에게 미안하단 소리를 자주 하셨고, 멀리 허공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하셨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시는 법이 없었다. 가족을 뒤로한 채 담배를 태우시는 법이 없었다. 아빠가 갖고 계셨던 가족에 대한 마음, 태도셨다.


  어린 날의 기억조차, 한 번의 개인의 여가를 가진 적이 없으셨다. 아빠의 가방에는 커다랗고 무거운 연장이 한가득씩 들려 있었다. 현장에서 사다리를 타다가 떨어진 그날도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으셨고, 취미생활로 아빠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조금 넉넉한 날, 엄마의 손을 잡고 볼링을 치러 가셨다. 아빠의 작업복에 먼지가 덜한 날, 우리를 데리고 시장 단골집으로 곱창전골을 먹으러 가셨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가장 흔들었던 때는 우리가 옥탑방에 살아야만 했을 때였으리라. 무허가 옥탑방에 남몰래 살아야  , 아빠는 오십이 훌쩍 넘었었다. 나이와 함께 아빠의 한숨과 먼지, 주름이 쌓여만 갔다. 켜켜이 쌓인 주름 사이로 장마철 빗줄기가 집으로 스며들었다. 아빠가  마디 내뱉기 전에, 우리는 실컷 웃었다. 빗속을 헤매는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온갖 주방 용품과 화장실 대야를 꺼내 물을 퍼내었다. 신나게 물을 퍼내면서 아빠의 먼지도 같이 쓸려가길 기도했다.


  아빠가 보여준 그 마음과 태도는 우리 가정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나이가 들어 아빠의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그 태도에 존중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아빠가 선택하고 나아간 길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당신의 딸이 보기엔 그 누구보다 성공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평생 가장으로서 간직하신 그 성실한 태도를 어리지만, '알고 있다'라고 말씀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깔깔 웃었다. 아빠가 더 이상 가족에게 미안해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씁쓸해하지 않도록, 실패했다 느끼시지 않도록, 힘껏 웃었다.


  나는 철없음을 내걸며 아빠의 작업복 바지를 입고 몇 차례 외출을 했다. 그리고 아빠는 더 이상 작업복의 먼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게 되었다. 밖에서 아빠를 만나면 퀴퀴한 작업복 사이로, 방긋방긋 웃으며 꼭 팔짱을 꼈다. 아빠랑 단 둘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밖에서 사들고 온 떡볶이를 나눠 먹기도 했다. 아빠의 현장에서 꼭 알바를 해야겠다며 일주일 동안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아빠가 평생에 보여주신 태도에 비할 것이 아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그렇지만 작게나마, 아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도, 후회 없이 아빠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진심으로 아빠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가짐을 말이다. 그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았던 아빠의 태도에서, 아빠 당신에게서 늘 꽃내음이 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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