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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시간을 헤아리다

진료실 밖에서 삶을 배우다

by 도시 닥터 양혁재

어릴 적 나는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조금 더 참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꿈에 그린 멋진 어른이 돼 있을 줄 알았다.


노력 끝에 의대에 들어갔고, 고된 전공의 과정을 거치며

결국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었다.

하루 종일 진료와 수술로 바쁜 나날,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유언도 그러했다.

"항상 정직하게 살거라. 훌륭한 의사가 되어 항상 남을 위하고 돕는 사람이 되거라."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누군가를 돕는 일일 텐데 어딘가 마음 한쪽이 자꾸만 허전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진료가 없는 주말이면 길을 떠났다.

고속도로를 지나, 비포장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조용한 시골 농촌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머님들에겐 병원에선 보지 못했던

아주 오래 묵은 아픔이 있었다.


무릎이 아파도, 허리가 굽어도

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이름에 대한 이야기.


눈물을 나눈 그 시간이 나를 조금씩 바꿨다.


이젠 진료실에 앉아 있어도 내 앞에 앉아계신 환자가

어떠한 삶을 사셨을지, 아픔 뒤에 숨은 오래된 삶을 먼저 보려고 한다.

그분들에게 삶을 배우며, 고단함 속 피워내는 미소의 무게를 조금씩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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