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이쁜우리맘의 42번째 주인공 미란 어머님. 고교 재학 시절, 갑작스럽게 아버님이 병으로 쓰러지시고, 어머님은 어린 나이에 실질적인 가장이 되셨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님은 일찍이 생계 전선에 뛰어드실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대학 진학을 포기하셨다. 유난히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어머님, 그중에서도 특히나 그림을 좋아했던 어머님은 그렇게 꿈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셨다.
다들 본인의 길로 나아갈 무렵, 어머님은 직장 동료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셨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이제 더는 고생하지 않고 행복할 줄로만 알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동생을 비롯한 대가족을 모두 혼자 건사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척추를 다친 시아버지 간병까지 전적으로 도맡아야 했다. 여기에 더해 막막한 생계를 위해 농사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지난 세월. 어머님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위해 살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그토록 원했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으셨던 미란 어머님.
가족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헌신했던 어머님이, 정작 당신이 원하는 그림은 눈길도 줄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슬펐던 나는 어머님께서 다시금 연필과 붓을 손에 잡고 그림을 그리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다가 성연 씨의 제안으로 소규모 사생대회를 열게 됐다. 햇볕이 잘 드는 어머님 댁 마당에 이젤 대신 의자를 이용해 임시 공간을 만들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어머님은 화가를 꿈꾸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무척 좋아하셨고, 어머님의 행복한 미소에 힘입어 나도 옆에 앉아 그림을 그리게 됐다.
좋은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온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집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어머님을 살폈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신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눈에 담고 싶었다. 현실 때문에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림 작업을 다시 시작한 어머님의 활기찬 모습을.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그림이 완성됐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스케치부터 채색까지 마쳤지만, 어머님의 실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나와 달리 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마당을 아름답게 그려내셨다. 스케치부터 채색까지 완벽했던 작품. 전문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아보신 적이 없음이 분명한데도, 마치 전문가 과정을 밟은 것처럼 수준급의 그림을 완성하시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어머님이 당신과 나의 그림 감상에 푹 빠져 계실 동안, 나와 성연 씨는 몰래 빈 방으로 달려갔다. 현실의 벽 앞에 무너져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어머님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평생을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고 싶다는 어머님을 위해 작은 화실을 만들어드렸다. 커다란 이젤 한 개와 의자 그리고 약간의 채색 도구가 전부지만, 어머님은 새롭게 생겨난 화실을 마주하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꿈인지 생시인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좋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옆에 다가간 성연 씨. 그녀는 수줍게 책 한 권을 어머님께 선물했다. 그 책을 주인공은 '그랜마 모지스'로 75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 101세까지 장수하며 미국의 국민화가로 활동한 화가였다. 한평생을 농부의 아내로 살며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었던 시골의 한 할머니가, 남편을 떠난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미국의 국민 화가로 추앙을 받게 되다니. 이거야말로 정말 기적이 아닌가.
성연 씨는 이런 기적이 미란 어머님께도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건넨듯했다. 성연 씨의 선물을 받아든 어머님께서는 그렇게 한참을 책에서 눈을 거두시지 않았다. 그랜마 모지스 작가처럼 어머님께서도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겠다는 용기와 희망을 얻으신 눈치였다.
나 역시 성연 씨와 같은 마음이다.
부디 너무 늦기 전에, 미란 어머님께서 다시 그림을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팔 토시를 착용하시고, 한 손에는 형형색색의 물감이 가득 담긴 팔레트를, 또 다른 손에는 붓을 들고 어머님의 그림을 완성해나가셨으면 좋겠다. 이제는 어머님께서 정말 좋아하는 일만 하시면서, 온전히 당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그렇게 항상 웃고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아들은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