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너무 좋아하면 오히려 더 닿을 수 없어진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되레 멀어진다. 좁디좁은 박스 안에 온몸을 구겨 넣는다.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숨은 의도가 있을 때가 많다. 그 속을 도통 알 수가 없다. 어느 높고 먼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사랑하듯 바라보다가 펀치를 날린다. 말랑말랑 흐물흐물 유연하다. 예쁘다. (대문사진은 미안하다 얘들아)
‘고양이의 보은’을 봤을 때부터인가, 어릴 적 반짝 유행했던 고양이 카페에 갔다 온 뒤부터인가. 예쁘게 생긴 말랑흐물한 동물을 처음 좋아하게 된 순간이 언제인지 떠올려보지만, 당연히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시작이 늘 그렇듯, 아무것도 아닌 아주 작은 호감이었을 테니 생각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아마 집에 오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와의 눈인사로 약간의 호감이 생겼을 수도. ‘쟤 예쁘게 생겼네’ 정도의 관심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 내 방 곳곳에 붙여진, 놓인, 세워진 고양이 굿즈들을 보면 가관이다.
아이돌 굿즈는 사 본 적 없어도 양어장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유튜버의 고양이 굿즈는 시간 맞춰서 사봤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포토북은 사 본 적 없어도 고양이 유튜버의 책은 사봤다.(책에 고양이 사진이 많다) 이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고양이 굿즈가 있더라. 컵, 양말, 달력, 옷, 책갈피, 모형… 반려묘 없음에서 오는 결핍을 든든히 채워주고도 넘칠 정도로 많다. 살아있는 고양이 대신 살 수 있는 것들을 모으다 보니 어딜 가도 고양이 굿즈가 먼저 보이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나, 아빠가 어디서 새끼고양이 두 마리를 데려왔었다. 작은 박스 안에 그보다 한참 더 작은 고양이 두 마리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 집이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울 수 있는 형편인지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데려왔고 엄마는 당장 다시 갖다주고 오라며, 자기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며 몸을 벅벅 긁었다. 나는 별안간 생긴 반려동물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에서 고양이 키우는 법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빌려 엄마의 눈길이 닿는 곳곳에 올려두었다.
‘엄마, 고양이는 키우기 쉽대. 손이 많이 안 간대’
‘엄마, 고양이 너무 귀엽다 그치?’
‘엄마, 고양이 키우는 게 내 소원이야’
하지만 고양이 알레르기뿐만 아니라 고양이가 기분 나쁘고 무섭다는 엄마를 이길 수 없었고 새끼고양이들은 다시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돌아갔다. 아직 두 마리 중 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름도 못 지어 불러보고, 제대로 된 밥도 못 먹이고 그저 우유만 먹이다가 보냈다. 아빠가 다시 고양이 상자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을 때 펑펑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하면서 펑펑 울었다. 그때 그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내 인생에서 동물을 키워본 유일한 시간이었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고양이랑 같이 자고 싶은 날. 단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 작고 따뜻하고 귀여운 동물과 함께 자는 로망이 늘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서 하루 자던 날에는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이부자리를 깔고 자연스럽게 고양이가 내 곁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최대한 얌전히 조용히 가만히 있다가 내 옆에 온 순간, 고로롱거릴 때 살짝 만져본 그 말랑흐물따뜻한 감촉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감격이 왜 감격이고 기쁨이 왜 기쁨인가. 원한다고 해서 매일 누릴 수 없으니 감격이고 기쁨인 것이다. 친구 중 유일하게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네 집이 비어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외박해야 누릴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외롭고 쌀쌀한 밤 고양이와 함께 자고 싶을 땐 고양이 얼굴 모양의 쿠션을 쓰다듬는다. ‘이건 고양이다.. 말랑한 게.. 어쩌면 이 쿠션 안에는 살아있는 고양이가 들어있는지도..’ 미친 사람처럼 쿠션을 꼭 끌어안는다.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하는 말이 있다. 어릴 때 내가 엄마에게 했던 그 말.
‘키워봐. 고양이는 키우기 쉽대. 독립적이어서 손이 많이 안 간대. 집에 사람이 없어도 괜찮아’
이제는 이 말이 거짓말임을 안다. 그저 미디어로 접한 고양이의 이미지만을 생각하고 하는 말임을 안다. 정말 텅 빈 곳에 홀로 오래 있으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그보다 집에 들인 가족 같은 존재를 그렇게 오래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말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어릴 땐 엄마의 반대로 키우지 못했고 지금은 생명의 무게를 알게 돼서 키울 수 없다. 내가 잘 키워줄 수 있을지, 나랑 살면서 행복할지, 이별의 순간은 어떻게 극복할지. 상당한 돈과 결심이 필요하다.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지만, 나는 아마 그저 고양이 애호가쯤으로 살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