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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생 관찰 일지

by 무긴이

20xx년 x월 xx일,


눈을 감으면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막연한 어둠의 표면에는 길쭉하고 구불거리는 하얀 도형들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다. 미생물 같아 보이기도 하고, 끊어진 실 같기도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시각이라는 틀에서 자연스레 벗어난다. 보는 것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변환되는 것이리라. 세상엔 그런 것들이 보편적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


무한한 하늘과 그 아래 푸른 들판 위에 네 발 달린 생물이 서있다. 발 끝은 두 개의 홈이 파인 굽 같은 것이 달려있다.-일반적인 동물의 굽은 아니다.- 발목은 보통 사람의 손목정도지만, 몸통으로 갈수록 두꺼워져서, 다리는 고깔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다리의 짧고 얇은 털은 갈색과 초록색이 섞여 오묘한 색을 내고 있다. 몸통은 복실거리는 두꺼운 털들로 덮여있고, 목 끝에는 머리가 달려 있다. 머리는 앞 뒤로 길쭉해서 앞에는 둥그런 코가 떨어질 것처럼 매달려 있고, 뒤로는 코와 대비적인 뾰족한 귀가 달려 있다. 얼굴 양 옆에는 빨간 눈이 박혀있는데, 눈꺼풀이 없는 게 인상적이다. 머리 가운데에는 뭉뚝한 혹이 튀어나와 있는데, 뿔 같기도 하고, 누군가 해변에서 주워온 자갈을 올려놓은 거 같기도 하다. 엉덩이에는 긴 꼬리가 붙어 있다. 밧줄 같이 생긴 것들이 여러 가닥 모여 있는 형태를 하고서.


이 생물은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의 최종적인 진화 형태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실소)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과 같다. 무인도에서 1달러 지폐를 찾는 거 같이 희박한 확률처럼. 이 생물이 언제부터 이 들판에서 생활했는지 알 수 없다. 이 들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는 거 아닌가? 이 생물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이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알다시피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인식 속에 각인되어야 그 개념이 성사된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존재란, 누군가의 기록 장치에 어떠한 흔적을 남길 때 그 의미가 발현된다. 이제부터 나와 당신이 이 생물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 인식 속에 이 생물의 존재를 발현시키는 이름을 새길 것이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물생’


물생은 굉장히 느긋하다. 보통 5분이면 되는 거리를 구름이 모두 지나가 없어질 때까지 도착하지 못한다. 어쩌면 물생의 시간성은 우리와 다를 수 있다. 중력이 다를 수도 있다. 근육 구조가 다를 수도 있다. 애초에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물생은 울타리가 없는 들판에 자신만의 틀을 만들어 놓는다. 그 틀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는 있다. 물생은 그 틀을 넘을 수가 없다. 굵은 다리가 천천히 움직여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호흡이 불안정해는 것이 느껴진다. -그 빨간 눈 안에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리라.- 그리곤 고개부터 서서히 시작되어 꼬리까지 몸을 돌린다. 틀은 있는 걸까? 틀은 없다. 하지만 있다. 물생은 그 틀을 정확히 알고 있다. 물생이 움직이는 반경을 며칠이고 보다 보면 얼추 틀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그 형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어려우나, 확실히 동그라미나 네모는 아니다.


물생은 평생 들판 위에 그어진 틀을 맴맴 돌고 있다. 그들에게는 태양도, 달도, 별도, 구름도, 바람도, 비도 중요치 않다. 그저 움직이고 혼란하고 다시 돌아가고 또 돌아갈 뿐이다. 물생을 보고 있으면 여러 상념들이 피어오른다. 그들의 혼탁한 혼미와 모색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굴레를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것은 의무와 책임일까? 인식을 벗어난 본능일까? 나는 알 수 없다.


물생은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처럼. 너와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두 개의 달이 떠있는 1Q84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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