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기분이 들 때면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다. 안개가 내려앉은 겨울 새벽에 내뱉는 입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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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새벽마다 혼자 꽤나 멀리까지 걷곤 했다. 아마도 세상이란 것을 조금씩이나마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보다는 사소한-당시 나에게는 거대한- 일부분이 인지되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걸 좋아해야 하며, 싫어해야 하는지 분간이 안되던 시절이란 것이다.-지금이라고 해낸 것은 아니다만- 그래서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거 같았다. 걸을 때는 천천히 오랜 시간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주황빛으로 물들어 버린 거리를 누비며, 엠피쓰리 플레이어에서는 우울감을 덧칠해 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라디오헤드, 국카스텐, 브로콜리너마저, 오아시스, 너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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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전역하고 10년이 지났다. 군전역 후에 나는 10년이라는 미래가 저 멀리에 눈곱만치 작은 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점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던 시절은 지났다.
10년이 지나 얻은 건 덤덤함이다. 그리고 남은 건 빈 방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버린 마음속 텅 빈 방. 방에는 아무것도 없다. 수납장도, 침대도, 텔레비전도, 액자도, 앨범도, 아무것도 없다. 가슴 시린 기억과 그리운 추억들이 뿌연 먼지처럼 퍼져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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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예술 수업이 있었다. 나이 많으신 교수님이 항상 주먹만 한 벨트를 반짝이며 열변을 토했다.-진짜 구토하듯 많은 말들을 쏟아 냈었다.- 강의는 항상 미학에서 시작해서 락으로 끝을 맺었다. 정확히는 시작만 미학이었을 뿐이었다. 핑크플로이드, 딥퍼플, 레드제플린 등 락밴드 음악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특히나 에어로스미스의 드림 온이라는 노래는 애국가만큼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자네는 이 노래를 아는가?”
“아니요. 모릅니다.”
매번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 교수님은 지난주에도 이 노래를 틀었지만 내 대답에 다시 노래는 재생되었다. 교수님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리둥절함이 묻어 있었다. 분명 데자뷔는 아니지만, 누군가한테는 데자뷔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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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어느 교회에서 나라는 사람이 태어났다.-내가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존재였지만, 언제부터 내가 들어섰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을 34번째 돌고 있다. 내가 무엇을 얻든, 모든 것을 놓치든, 지구는 회전하고 있다. 태양도 돌고 있고, 심지어 태양계도 어지럽게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도 움직이고 있다. 액셀을 밟고 브레이크를 밟으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수많은 가로등은 과거라는 긴 줄기가 되어 빠른 속도로 뒤로 넘어가고 있다. 나도 결국은 돌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숙명적인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