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할 수 있는 영화 이야기
언제부터인가 영화관을 찾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영화관에서 보았던 마지막 영화도 기억나질 않을 만큼 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가 있지 않겠나. 꽤나 좋아했지만, 시시해지는 날이 있을 테고, 전혀 관심이 없던 것에 마구 애정이 생기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삶에 덤덤한 흐름이리라. 그런데 며칠 전 저녁을 먹고 6시쯤이었나, 문득 누군가 꼭 보라고 추천해 주었던 ‘그 영화’가 떠올라, 즉흥적으로 표를 예매했다. 누구나 그렇듯 그런 날이 있는 거다.
1. 감각적
처음 장면은 투명한 흰자와 노른자가 하늘색 판 위에 올려져 있다. 그리고 주사기가 등장하여 노른자에 바늘을 찔러 형광 액체를 주입한다. 노른자는 곧 꿈틀거리다, 다른 노른자가 복제되어 나온다. 내가 이 장면에 인상 깊었던 것은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메타포적인 연출이 아니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강한 인상을 준 부분은 극장의 큰 스크린에 맺힌 시각적인 정보보다, 그 장면을 둘러싼 ‘소리’였다. 이 영화는 음악을 포함한 음향 연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느껴졌다. 특히나 음악이라는 요소가 그러한데, 특정한 상징이 내포된 장면에서 특징적인 음악을 사용하여, ‘그 상징’을 그 영화에게 주어진 시간 내내 관객에게 -정확히는 나에게- ‘각인’ 시켜준다. 또한 음악을 영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극이 굉장히 감각적으로 진행된다. 특히 개성 있는 화면 구성이 사운드와 함께 영화의 리듬감을 더욱 살려준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화면 구성과 전환은 개인적으로는 신선하고 특이했다고 생각한다. 정보나 분위기를 보여주는 넓은 화면의 배경 중심 구성보다는, 인물 중심의 가까운 화면을 연속적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눈으로 음악을 듣는 기분을 들게 한다. 2시간이 넘는 -어쩌면- 긴 시간 동안 영화는 눈과 귀의 감각을 리듬으로 달래며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느끼게 한다. 그러한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주인공B의 의식이 다시 주인공A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벼락같은 적막··· 어둠 속 가로등에 비친 차도··· 순간 달려오는 오토바이··· 그리고 탁! 짧은 순간이지만,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우연히 길에서 스친 낯선 이에게서 익숙한 향을 맡은 기분이 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이 영화는 -후반의 시퀀스를 제외한- 모든 순간이 감각적인 호흡들로 가득하다.
2. 상징적
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글을 더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할 말은 많으나 초라한 필력에 생각은 방황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았던-영화를 좋아하는- 어떠 사람과 술자리를 갖는다면,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영화의 서사에 대한 단편적인 내 감상평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했던 <기기괴괴-성형수>가 떠올랐다고 하면, 내 생각을 보여줌에 있어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는 메시지에 더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나- 141분이라는 시간 위에 개연성보다는 상징과 감각적인 리듬이 올려져 있다. 감독은 메시지를 위해서 아주 과감하게 미장센을 꾸미고 화면을 배치했는데, 그것을 조화롭게 모으는 능력이 아주 탁월하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말투가 거슬릴 정도로 독특한데, 그 화술이 생각보다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홀려서 듣다가, 말이 끝나면 -무릎을 딱 칠 정도는 아니지만- 입술을 삐죽 내놓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언변을 가졌다는 의미다.
영화는 메시지를 위해 상징적인 요소를 많이 활용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탑앵글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거나, 주인공A가 더운 날에도 꼭 껴입는 노란 코트라던가, 음식을 폭력적이고 괴랄하게 연출한 예, 혹은 대놓고 텍스트를 화면에 가득 채우는 경우 등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상징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다른 영화감독의 표현법을 익살스럽게 활용하였는데, 중심에는 아마도 스탠리 큐브릭과 쿠엔틴 타란티노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사운드 트랙과 피로 낭자한 복도, 그리고 에반게리온 초호기처럼 솟구치는 피가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과 메시지는 내게 큰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나는 서브스턴스 약물이 눈앞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쓰지 않았으리라. 지금의 내가 젊어진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약간의 활기 정도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서사를 감고 있는 수많은 상징과 감독의 호흡은 이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받아들이게 해 주었고, 내게도 -명확하진 않지만 어떠한- 의미를 만들어 주었다.
3. 그래서
검은 화면에 흰 글자의 행진이 스크린의 상단을 모두 지나고 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정신이 멍했다. 내가 무엇을 본 것일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눈앞에 무엇이 스쳐 가고 망막에 맺혔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서브스턴스라··· 심심한 나물밥만 먹다가, 땀이 뻘뻘 나는 매운 갈비찜을 먹은 느낌이다. 맞아. 나 이런 맛 좋아했었지. 비록 흐른 땀 때문에, 얼굴에 휴지조각이 붙어 있을지언정. 이 영화를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물론 굳이 이 전반적인 의견을 단순화할 필요는 없지만-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같았다. 마지막 시퀀스를 보며, 왜인지는 정확히 말할 순 없으나, 레오 까락스 감독이 떠올랐다. 여러 빛깔의 간판 불빛으로 가득한 밀도 높은 안갯속에서 부스스한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마른 아저씨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 느낌이랄까.
한 가지 고백할 사실이 있다. 솔직한 평을 말해 보자면, 마지막 시퀀스는 내게는 지루한 동어 반복처럼 느껴지게 했다. -레오 까락스가 지루하단 의미는 아니다.- 후반 시퀀스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영화 내내 등장했던 상징(메시지)을 관객들이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전하고 싶은 내용을 다시 또박또박 말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부분이 앞에 감각적이고 리듬감 있게 진행되던 날 센 흐름이 순간 고이고 고여 진흙이 되어 버린··· 뭐, 그저 그런 기분 탓일 수 있겠으나. 그래도 오랜만에 -긍정적인 의미로- 정신 나간 감독을 만난 것 같아서 기분 좋은 저녁이 될 수 있었다. 좋은 영화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아, 그리고 SUBSTANCE라는 뜻은 ‘늘 변하지 아니하고 일정하고 지속하면서 사물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Remember You Are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