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은 사실(?) 브루스 웨인이다. 그에겐 특별한 초능력은 없다. 그의 능력이라고 하면 어마 무시한 부와 어릴 때 부모님이 살해당한 트라우마로 악에 대한 복수심-혹은 광기 충만한 집착-정도. 마블에도 아이언맨이 비슷한 포지션에 있지만, 아이언맨은 위트와 첨단과학으로 무장을 했다면 배트맨은 우울함과 악바리로 무장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이 영화는 배트맨이 곧 브루스 웨인!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배트맨은 자신의 방향성과 목적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그것들을 부단히 되새기면서 위험천만한 상황들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그러나 결국 배트맨도 연약하고 미완의 존재인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불쑥불쑥 브루스 웨인이 튀어나온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 하면 경찰서 탈출 장면이 그러하다 생각한다. 경찰에게 쫓겨 경찰서 옥상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장면인데, 보통의 슈퍼히어로 영화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브루스 웨인은 그렇지 않았다. 상당한 높이에 겁에 질려 주춤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누구나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겁먹을 수 있고 주춤할 수 있겠다만, "배트맨"에게서 그런 모습은 내게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2. 심연의 히어로
이 영화는 지금껏 나왔던 배트맨 영화 중 가장 우울하고 어둡다. 분위기, 대사, 음악 모든 것이 어둡고 축축한 영화다. 범죄로 득실거리는 고담시를 잘 표현했고,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인 배트맨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배트맨에게서 조금의 유머나 가벼움을 모조리 싹 제거했다.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처럼 너무 사교적이고 유쾌한 느낌에 대비되는- 배트맨은 이름 그대로 박쥐, 어둠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존재다.
이번 영화 속에서 배트맨은 슈퍼히어로의 주인공이라기보다 느와르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느와르적인 분위기의 어둠 속에서 홀로 싸우는 배트맨은 히어로 영화에선 보기 힘든 무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상적인 영웅처럼 모든 이에게 응원받는 히어로가 아닌 이상한 복면을 쓴 정신 나간 자경단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표현이 다크나이트 때 보다 더 현실적인 히어로의 모습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3. 하지만 멍청이
(*스포주의*) 아무리 어두운 느와르 분위기를 진하게 풍겨도 이 영화는 분명 히어로 영화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정의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것이 요즘 히어로물의 흐름이라지만, 어찌 됐든 영웅과 악당의 대립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즉, 영웅과 악당의 첨예한 대결을 통해 관객들은 누군가를 응원하게 되고, (요즘은 악당을 응원하기도 하더라) 결국은 권선징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히어로 영화는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얼마나 흥미롭게 구성하는가에 영화의 재미가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메인 빌런은 리들러라는 캐릭터다. 배트맨 코믹스에서도 대표적인 악당이자 엄청난 지능의 캐릭터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에서 개구쟁이 데이빗 보위로 나왔지만 ㅠ) 리들러는 수수께끼와 암호를 사용한 범죄 수법으로 배트맨을 괴롭히며, 배트맨과 심리 싸움, 두뇌 대결을 하는 지적인 빌런이다. 이 영화의 예고편 또한 리들러와 배트맨의 두뇌 대결을 암시하는 추리물의 분위기를 많이 풍겼다. 하지만 그 속은 어땠을까?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마치 여름성경학교 보물찾기 같았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학생들을 위해 열심히 보물을 숨긴 선생님(리들러)과 보물을 찾기 위한 힌트들을 열심히 쫓아가는 착한 학생(배트맨)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기대했던 첨예한 심리, 두뇌 싸움은 온데간데없었다. 배트맨이 전략가 같은 면모로 리들러의 계획을 한 발 앞서 추리하여 그의 계획을 어지럽게 흔든다거나, 악다구니로 두뇌고 뭐고 분노로 계획을 깽판을 치는 것은 불사하고, 그저 계획에 순종하듯 그가 만들어 놓은 테마 공원을 유유히 따라가는 배트맨의 모습.. 정말로 비통하였다. 인간적인 모습은 좋았으나 멍청한 인간으로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도 히어로 하겠다고 박쥐 코스튬까지 하며 목숨을바칠 다짐을 한 브루스 웨인인데 말이다. 리들러가 고담시의 민낯을 끄집어내어 대중들에게 정의의 개념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런 거 일단 집어치우고 배트맨과 리들러가 잘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리들러에게 주야장천 (그것도 어설프게) 당하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그저 그런 주먹질로 모든 것을 끝장 내다니, 이렇게 아쉬울 수 있겠는가.
심지어 리들러도 그다지 매력적인 빌런이 아니었다. (다크나이트 조커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