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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아버지를 상실했다.

존재의 나약함에 의한 지금 기분에 대하여

by 무긴이

아버지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존재의 나약함, 상실의 공허함, 죽음은 내게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일어났지만, 너무 분명하기에 무감각했다. 혹은 아버지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2006년, 그리 덥지 않은 여름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심야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특히 화요일에 방영했던 상상플러스라는 퀴즈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했는데, 출연진들의 능청스러움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날도 그 방송이 시작되기를 브라운관 스크린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아버지가 흰색 러닝셔츠에 트렁크 팬티를 입고 옆으로 누워있었다. 안방에는 동생이 자고 있었다. -아직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는 늦은 시간까지 회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떠한 말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늦은 귀가가 탐탁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최민구, 그만 들어가서 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나는 서운했다. 아버지와 함께 심야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게 중학생 소년의 소소한 기쁨인 것을 그는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입꼬리는 심히 내려가 턱에 걸쳐졌고, 한숨은 웅크린 입술은 뚫고 나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속한 가족의 장은 그 남자인 걸. 나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이어 방으로 향했다. 그런 뒷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그가 내 기쁨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내심 기대했다.


“안방 들어가서 아빠 가방 들고 와.”


아빠 가방이란, 아버지가 택시 기사를 업으로 하면서 필요한 현금을 모아 놓은 검은색 클러치 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가방을 가져오라는 것은 용돈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한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가방을 들고 왔다. 아버지는 가방에서 오천 원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나는 다시금 실망했다. 아, 만원이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빠가 요즘에 어려워서 그래. 다음에 더 많이 줄게” 아버지는 머쓱한 듯 말했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맙다고 답했다. 비록 기대했던 금액은 아니었지만, 담배 한 갑과 피시방에 가서 라면까지 먹기에 충분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받은 지폐를 야구 선수 카드로 가득한 작은 철제 상자에 넣어 두었다. 나는 접이식 1인용 침대에 누웠다. 천장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깜깜한 천장을 보고 있으니, 방문 너머 들리는 텔레비전의 웅성거림이 더욱 서럽게 들렸다.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서러움은 옅어졌다.


‘따르릉’


벼락같은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전화기는 안방에서 요란스럽게 울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텔레비전도 우렁찬 벨 소리에 기가 죽었는지 고요했다. 나는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방에 전등을 켜니 11살 남자아이가 큰 침대에 홀로 누워 쥐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저리 요란스러운 벨 소리에도 잘도 잔다고 생각했다. 나는 동생을 지나 전화기 앞에 섰다. 전화기는 울부짖듯 요동치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민구니?” 나이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나 큰 이모야.”

“아, 안녕하세요.”

“어, 그래. 민구야. 엄마랑 아빠 집에 없니?”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체 고개를 돌렸다. 벨 소리가 멈추니 집 안은 적막했다.


“네. 없어요.”

“그렇구나.. 알았어. 민욱이는 거기 있니?”

“네. 옆에서 자고 있어요.”

“그래. 민욱이 잘 챙겨줘.”

“네. 그럴게요.”

“그래. 착하다.”


큰 이모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집에 오면 자신에게 전화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고, 전화는 끊겼다. 집은 고요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래도 결국 일어날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이혼에 대한 암시를 내비쳤다. 심지어 어머니라는 사람은 대 놓고 내게 자신들은 이혼할 것이라며, 그때가 오면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내게 말한 적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당신들과 함께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조용히 생각했었다. 만약 그날이 도래한다면 동생과 둘이 떠날 것이다.

넓은 침대에 홀로 누워 세상 물정 모르고 입 벌리고 잠에 빠진 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웠던지 눈물이 차 올랐다. 잠이 덜 깬 동생을 내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비좁은 접이식 침대에 같이 누웠다. 나는 동생을 꼭 안아 주었다. 마음속 검은 호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마음은 가슴 한가운데 깊숙한 곳을 간지럽혔다. 호수 저 편에서 낯선 슬픔이 몰려왔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이 떠졌다. 민욱이는 아직 내 품에 안겨있었다. 이 아이는 세상 순수한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살포시 감긴 두 눈과 살짝 벌어진 입, 동생의 얼굴을 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대여섯 명쯤 돼 보이는 어른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천천히 둘러보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없는 듯했다. 외삼촌과 외숙모, 작은 이모와 큰 이모, 큰 이모부가 방에서 나온 나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어색한 인사를 건네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본 그들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부모의 이별에 확신을 가졌다. 혼란스러웠지만, 수없이 반복하며 상상한 탓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단지 올 것이 온 것이다. 큰 이모는 나를 불러 소파 앞에 앉혔다. 동생도 어느새 내 옆에 앉아있었다.


“민구야, 민욱아. 놀라지 말고 들어.” 큰 이모가 우아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 이모가 다음 문장을 뱉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문 밖에서 철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 그리고 집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민욱이와 내 앞에 앉았다. 털썩하고 쓰러지듯이.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리고 근심으로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했다. 그녀는 암울한 눈빛으로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졌다. 옆에 함께 앉아있는 동생을 생각하며.


“민구야. 엄마 말 잘 들어.”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가.. 너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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